명나라 학자 이탁오의 말인데, 현자들의 말은 젊은 시절에는 흘려듣다가 나이 들어 무릎을 치는 때가 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유교적 질서를 거스르는 혁신사상을 펴다가 체포되자 자결했다.
그는 55년 전 딱 이맘때인 1969년 5월 1일 새벽 5시,"판수야" 하고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대문을 열었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돼 남산으로 끌려갔다. 고춧가루를 타서 물고문하는 등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동베를린에 두 번 갔다 온 것 말고는 불 게 없었다. 동서 베를린 통행도 그런대로 자유로운 때였다. '유럽 간첩단 사건'은 2013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사형이 집행된 박노수 교수와 김규남 국회의원에게 뒤늦은 무죄선고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청년 김판수의 인생 행로도 완전히 뒤집혔다. 그는 감옥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책으로 도금을 연구해 출옥 후 호진플라텍의 모체가 되는 호진실업을 설립했다.호진플라텍은 반도체 리드프레임, 인쇄회로기판, 커넥터 등 전자부품 도금 분야에서 선두 기업이 됐다. 익천문화재단 공동이사장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그가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써왔는지 소개한다.
남의 얘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 핍박받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행세하더라는 거였다.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해 찾아갔지만 그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판수'일 뿐이었다. 1991년 대학가에서 분신 자살이 잇따를 때 김지하가 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는 글을 썼을 때는 그가 정신적으로 병든 것 같아서 오히려 연민이 느껴졌다고 한다. "무웅이가 한결같이 '넌 참 괜찮은 인간이야'라며 지지해준 것이 평생 못된 짓 안 하면서 살 수 있는 힘을 줬어요. 부나 권력이나 명성을 따라 적당히 흘러가는 삶을 거부하게 만들었죠." 낯가림이 심한 그에게 나를 연결해준 이도 염무웅 선생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염 선생에게 나를 연결해준 이는 을 창간한 백낙청 선생이다. 글로만 40여 년 사숙하다시피 존경했지만 뵌 적도 없는 백낙청 선생이 2021년 가을 지인을 통해 점심을 사주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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