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입부에서 변호사인 황정민은 차를 몰고 어느 산골짜기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 곧이어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유가족들과 소란이 벌어진다.
잠시 후 마을 청장년 몇 명이 마을로 돌아오던 중 입구에서 몇 명의 군인들을 만났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이어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을 아이들도 이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청장년들과 아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아이들은 쓰러졌고, 몇몇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깔리며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들 중 한 명이 채의진이었다.이날 마을에 있던 24채의 가옥이 모두 불탔다. 그리고 주민 127명 중 86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가까스로 살아남은 41명 중 12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불과 29명였다. 사실상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없앤 것이나 다름없었다.
1950년 1월 17일, 김용 초등학교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문한다. 그는 석달마을 주민들에게 100만 원을 건넨다. 그런데 이 돈은 배상이나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이었다. 이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 사건을 계속 공비가 저지른 것으로 호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장관은 유족들과 사람들 앞에서 해당 사건은 공비가 저지른 것이며 한층 더 투철한 반공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이 문서는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의 서한철 중 일부였다. 여기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석달마을 주민들을 소총과 유탄발사기, 수류탄, 총검 등으로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문서에서는 석달마을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로 의심할 근거가 적으며 오히려 두 번이나 군경의 작전에 협조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부에 진실규명을 요구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언론에도 수 차례 제보했지만 역시 관심을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미국 언론에 사건 보도를 요청하기 위해 라는 영문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실제 보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채의진은 이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증거를 찾고 정리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정부와 정치들에게는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많은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은 정치인들에게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채의진은 그러지 않았고 가해자인 국가를 준엄하게 꾸짖으려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피해자다운 모습'이 아니었다.진실화해위원회의 석달마을 사건 진실규명 이후 채의진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바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하지만 유족들 상당수는 긴 싸움으로 지쳐서 소송에는 채의진을 비롯한 네 명만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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