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걸 변화시키고 타락시킨다. 고귀하게 태어난 책은 한때 사회 변혁과 시대 추동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범속하고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책 만드는 이들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편집자들이 익명성 속에서도 자부심이나 소명의식을 잃지 않는 것은 오로지 책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고귀함 때문이다. 그것이 교환가치가 현격히 떨어지는 책에 수십 년을 바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은 이념보다는 관습과 버릇이, 촘촘한 사유보다는 활동과 취향이 더 활발히 지배하는 곳이다.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일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 은 책을 타락시킨 것으로도 이름이 거론될 만한 인물이다.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연합국의 눈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가명을 쓰고 과거를 지운 채 그는 그림자처럼 조용한 마을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삼림 감시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닭을 키우는 양계장 운영자가 되었다.
회고록 출판에 대해 아이히만이 얼마나 열렬한 욕망을 품었는지 살펴보자. “장정과 표지는 진줏빛 혹은 비둘기색 같은 단색으로 할 것. 제목은 가늘면서도 아름다운 글씨체로 맞출 것. 가명은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생각이 없음.” 그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표지 색깔, 편집, 서체, 본문 구성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흥분 상태를 이어갔다. 그는 자기 정당화의 욕구를 넘어 스스로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자문했던 한 유대인 사상가의 말처럼, 누가 봐도 악일 뿐인 일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었다. 이렇듯 그는 후대의 해석권을 자신이 선점하려는 마지막 욕망을 품었다. 이런 그의 행적을 처음 알게 됐을 때 나는 책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좋은 매체’라는 기존의 내 생각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히만에게 책은 칼과 총 이상의 날카로운 무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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