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극장간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6000~7000명에 달했을 만큼 간판 화가는 상영관 구성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1500명 정도만 남았고, 1990년대 초중반에 와서는 전국에 300명 남짓 남았을 정도로 쇠퇴했다.2000년대 들어 극장간판은 대부분 사라졌다, 한 극장에서 여러 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손으로 그린 간판으로 영화를 알리던 시대가 저물어 갔다. 그저 일부 극장에서 명맥만 잇고 있을 뿐이다.중장년 세대들에게는 영화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으나,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옛 시대의 유물이 된 극장 간판. 전남대 위경혜 교수가 펴낸 는 이 간판화가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영화에서 영화 미술의 한 영역을 차지했던 극장간판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원용 아래 그림을 배우는 문하생들이 있었는데, 는 오랜 시간 광주지역 극장의 간판을 책임졌던 김창중 화가를 중심인물로 두고 간판 화가의 삶을 엿본다. 김창중은 1932년생으로 1936년 부친이 자리잡고 있던 일본 후쿠오카로 건너가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귀국한 부친을 도와 행상을 했으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소질이 있던 그림 그리기를 하고 싶어 간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김원용의 제자였던 광주극장 미술부장 천기봉을 찾아가 견습생이 됐고, 도제 방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우연하게 운명처럼 김원용을 직접 만나게 되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간판 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간판 제작의 이면은 흥미롭다. 간판 구성의 권한은 미술부장에게 있었는데, 흥행 성적에 민감한 배급사가 간판 그림에 들어갈 내용을 조언하면 적극적으로 수렴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미술부장일 만큼 미술인의 자율성과 주도권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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