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11년 크레인에서 내려왔던 것도 연대의 힘이었고, 노란봉투법도 시민들이 만든 법이잖아요. 하지만 정치권하고 기업인들은요, 우리가 발전한 만큼 더 비열해지고 악랄해졌다고 생각해요.
김지도는 1987년 김주익을 처음 만났다. 멀리서 봐도 누가 김주익인지 알아볼 만큼 키가 컸다. 김주익이 129일간 고공 농성을 할 때 공장 출입이 저지된 김지도는 공장 근처 산복도로 위에 있던 작은 절 마당에 가서 85호 크레인을 쳐다보곤 했다. “그 당시 참담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컸죠. 주익씨가 그렇게 죽기 전날에 저한테 전화했었어요. 근데 제가 그 전화를 안 받았어요. 상황은 뻔한데, 뭐라고 할 말이 없겠더라고요. 그 벨이 울리는 시간이 정말 길었어요.” 김주익이 죽고 2주도 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곽재규도 크레인 옆 도크에서 투신했다. 9년 뒤 최강서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도 158억원 손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손배가압류라는 무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지난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를 외치며 파업을 했던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에겐 470억원이란 손해배상 소송이 닥쳤다.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제한하고 하청 노동자의 교섭권을 확대하는 노란봉투법은 국회 본회의에 회부됐지만 여야가 상정을 미루며 통과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김지도는 “노란봉투법은 이미 발생부터 시민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이걸 어떻게 다듬어서 정착시킬 것인지만 논의하면 될 것 같은데, 사회적 합의니 여야 합의니 하고 있다”며 “노동자 문제에 관련된 어떤 조그마한 법안도 허용되지 않는 건 어쨌든 다 기업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이 사회가 누구 중심으로 흘러가는지”라고 말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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