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준 특파원=일본 정부가 19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재추천한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이다.◇ 태평양전쟁 기간 조선인 2천명 동원 현장메이지 시대에는 기계화 시설이 도입돼 근대 광산으로 탈바꿈했다. 이어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구리, 철, 아연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다.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을 연구한 히로세 데이조 일본 후쿠오카대 명예교수는 이때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2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했다. 김호준 특파원=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의 모습. 사도광산 관리회사는 이 갱도에서 쓰인 광석 운반수단을 전시해놓았다. 사도광산에는 2천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했다. 2022.1.4 hojun@yna.co.
히로세 교수가 당시 일본 신문 기사를 인용해"1935년 7월부터 사도광업소에선 '낙토화 운동'이 시작됐다"며"이 시점에 하루 평균 1명꼴로 사고가 빈발해 '안전위원'이 경계해 1개월 평균 3∼5명 정도, 다시 말해 10분의 1 정도로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사도광산의 상징인 'V자형' 아이카와 금은산 김호준 특파원=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의 전경. 'V자형'은 17∼18세기 금광 개발 초기에 손 도구를 사용해 파 내려간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2022.1.4 hojun@yna.co.kr조선인 노동자 '모집' 당시 근로조건이 전달되지 않은 문제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등이 원인이 돼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1940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사도광산에서 도주한 조선인 노동자는 148명이었다.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동원된 조선인 1천5명 기준으로 보면 약 15%가 도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정 연구위원 등이 저술한 책에는 사도광산 측의 보고 자료를 인용해 1942년 3월까지 동원된 조선인 1천5명 중 10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유산의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로 한정해 조선인 강제노동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유산이 지닌 '전체 역사'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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