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가면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이 함께 있어 합쳐 부르면 영녕능인데 대개 영릉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세종의 영릉만 들리고 효종의 영릉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효종은 재임 내내 북벌을 기치로 내세웠기에 세종에는 미치지 못해도 조선의 왕 중에선 존재감이 있는 편이다. 벌은 천자가 난적을 토벌하는 행위인데 병자호란 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오랑캐를 치려 했으니 대단한 도전이 아닌가.
송시열이 이런 식으로 북벌론에 불을 지폈어도 실제로 청을 정벌하겠다는 건 그의 속내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는 다분히 명분에 입각한 북벌론이었다. 또 청이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중화 문명을 유일하게 계승한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따른 북벌론이었다. 이런 북벌론만이 광해군의 명·청 등거리외교에 반대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이데올로그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효종의 북벌론은 송시열의 북벌론과 과연 달랐을까? 글쎄다. 효종은 정통성 콤플렉스를 지닌 채 왕위에 올랐다. 소현세자가 청과 가깝다고 해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자 효종이 소현세자와 그 아들을 제치고 왕이 돼서다. 그러니 왕위 계승 상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면 효종에게 북벌이 가장 좋은 답이었다. 송시열의 산당도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북벌을 전면에 내세웠다. 본거지 속리산 화양동에 만절필동을 새기고, 명나라 제도와 풍습을 따라야 함을 강조한 집단이 산당이 아닌가. 그래서 효종도 북벌론으로 이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었다.그런데 북벌을 현실에 옮기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무엇보다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데 당시 군정의 폐단이 커서 군사력 강화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청은 조선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봐 군사력을 무턱대고 늘릴 수 없었다. 효종이 인선왕후 이외에 한 명의 후궁만을 둔 채 북벌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제스처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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