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천씨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황태가공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겨우내 양구의 노지 덕장에서 말린 황태를 가져와 제품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공장에 들어서면 말린 황태 향이 가득하다. 가공실 옆방에는 산처럼 쌓여있는 말린 황태 더미가 개별포장을 기다리고 있다.그가 1972년 납북될 때 승선했던 배 역시 아버지의 배였고, 형과 함께 승선하여 조업 중에 납북되었다. 이씨는 비록 나이 어린 동생이었지만, 납북될 당시 기관장 일을 맡았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씨의 형 역시 납북귀환어부로 모진 고문을 받았고 현재는 암투병 중이다.이덕천씨는 아버지 소유의 동덕호라는 풍선에 승선하면서 뱃일을 익혔다고 한다. 그 뒤 동덕호가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10톤짜리 대양호로 개조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는 학교에 다니면서 배를 타는 당일조업에만 참여했다.
나중에 선장의 말에 의하면 대한민국 함정이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탈출했었으나 결국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대양호는 북한 쾌속정에 붙잡혀 끌려가고 말았다. 속초에서의 최초 심문과 조사가 끝나고 강릉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된 선원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선장과 기관장들만 감금 구속되었다고 한다. 함께 납북되었던 친형도 이때 풀려났다고 한다. "옥살이 중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복역하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보통은 복역 중에도 직계 가족이 상을 당하면 며칠씩은 보내주는데 나는 반공법 위반자라고 해서 내보내 주지 않더라고요. 부모가 죽었는데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략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어머니가 면회를 오셔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알게 되었죠. 그때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죠. 내가 납북되었다가 돌아와서 다시 징역살이를 하고 있어 아버지가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더 몸이 안 좋아져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이씨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대양호가 정박해 있던 속초항을 찾았다. 그러나 대양호는 1년 6개월 동안 배를 운행하지 못해 이미 침수된 채 운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시에 같이 넘어왔던 배 4척 모두 비슷한 상태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재혼을 했지만 여전히 경찰의 감시로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로 인해 아내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통은 자식에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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