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매화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매화만 보면 나는 한동떡이 생각난다. 한동떡은 한센떡, 그러니까 훗날 장센떡이 된 이의 시어머니였다. 왜 한동떡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시집오기 전 살던 동네가 한동이었을 테지.
같은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만 나는 한동떡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동떡은 주로 논밭, 아니면 산에 있었고,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집 밖 걸음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보름날 밤이면 동네 논에서 달집을 태우곤 했다. 동네 사람 다 모인 흥겨운 자리에 종 출신인 한센 내외와 음전하기로 소문난 한동떡, 몸 약한 우리 엄마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무동 태운 채 아버지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집 주변을 뛰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빚어낸 리듬은 흥겨웠고, 높이 솟은 보름달은 어쩐지 처연했다. 음전해서, 몸이 아파서, 종의 자손이라서 이 흥겨운 잔치에 끼지 못하는 한동떡과 엄마, 한센네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진 탓이었을까?
음전한 한동떡은 엄마처럼 위가 약해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한동떡은 간혹 들에서 캔 약쑥의 생즙을 내 어린 손자에게 들려 보냈고, 엄마는 그 답례로 읍내 약방에서 사온 소다를 내게 들려 보냈다. 한동떡은 죽은 밤나무 가지처럼 버석하게 마른 데다 차디찬 손으로 기어이 내 손에 고구마나 콩깨잘, 곶감 같은 것을 들려 보냈다.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동떡과 그 아들 장센 부부는 동전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그악스럽게 일해 해마다 논을 불렸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사는 것은 다 귀하디 귀한 시절이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을 볼 때마다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휴학과 학사경고로 남보다 졸업이 일 년 반이나 늦어진 어느 날, 엄마가 한동떡 집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뭘 갖다주라 했는데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마루 끝에 한동떡이 엉덩이를 쳐든 기이한 자세로 엎드려 있고, 장센떡이 된 한센떡이 엉덩이 근처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일평생 몸을 놀려 자손들 살아갈 논을 늘린 한동떡은 몇년 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이의 고단한 일생을 아는 이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 엄마의 기억 속에서도 한동떡은 희미해지는 중이다. 누구의 삶이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생명의 이치, 억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미욱하여 무르익어 시드는 매화가 서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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