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나로 죽었다가 남으로 깨어나면 혹시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죽었다가 일제강점기 부산 어시장 근처 하숙집 딸로 깨어날 일은 없다. 여기의 내가 죽었다가 1989년 미국 뉴욕에서 깨어나 성공을 꿈꾸는 자이니치 3세 청년으로 살아볼 일도 없다. 무엇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는, 일단 죽으면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다행히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가도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남는다. 삶은 유한하나 ‘살아낸 이야기’는 불멸이다.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내가 아닌 남이 되어볼 수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던 삶을, 그 마음을, 죽었다 이야기로 깨어난 사람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다. 〈파친코〉의 그 낯선 톤과 매너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이민진은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미국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 이민진 작가가 쓴 책의 첫 문장. 이 한마디가 애플tv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의 모든 근사한 매력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내가 본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거의 예외 없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고, 그게 지금도 얼마나 상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에겐 늘 선자가 아니라 복희가 주인공이었다. 5화에서 복희가 들려준 삶의 궤적이 응당 우리 역사의 메인 서사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작자 이민진의 눈에는 같은 역사가 다르게 보였다. 그의 작품을 오리지널 시리즈로 기획하고 각색하고 연출한 한국계 미국인 창작자들에게도 우리 역사는 다르게 읽혔다.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서러움보다 ‘나를 빼앗기지 않은 사람들’의 단단함이 더 돋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로하기보다 ‘살아남은 자의 기품’을 예찬하는 데 더 힘을 쏟는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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