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는 한국영화운동의 정신이 시작된 곳이었다. '영화운동'의 출발이 광주민중항쟁 이후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1980년 5월의 아픔은 '영화'에 '운동'이 더해지게 했다. 1980년대 한국영화운동의 성과물인 장편영화 가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한국 영화운동에 있어 광주가 갖는 의미를 상징한다.서울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 영화운동에서 지역의 경우는 부산영화운동이 대표적이었다. 1984년 시작된 부산씨네클럽과 1985년 부산대학교 영화패 살리라, 1988년 꽃다림 등의 활동이 도드라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목받은 활동이 덜했을 뿐 광주에서의 영화운동 시작도 1984년대 초반이었다. 시기적으로 부산씨네클럽이 만들어진 시기와 비슷하다. 다른 지역의 영화운동이 대부분 1990년대 이후 들어 활성화된 것을 감안하면 광주의 영화운동의 출발은 이른 편이었다.광주 영화운동의 바탕이 된 것은 1970년대 문화운동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만들어진 민중영화가 광주 상영만큼은 유독 치열한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은 영화운동에서 광주가 갖는 비중을 상징한다. 민중항쟁의 도시 광주는 서울만큼이나 격렬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영화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영화를 지켜내면서 영화운동 진영에 힘을 불어넣은 것이다.광주 영화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사로서 광주 문화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 광주 문화운동 출발의 주역이었던 윤만식에 따르면 광주 문화운동은 1970년대 YMCA가 개설한 탈춤강습이 본격적인 태동이었다.윤만식은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에서"1971년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소재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학원에 다니며 재수 삼수를 하는 과정에서 종로 2가 서울 YMCA에서 열렸던 탈춤강습회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하지만 당시에는 강습 대상이 대학생으로만 제한됐다.
조대영은"페미니즘 영화제 작품 수급을 위해 서울의 민간 시네마테크 씨앙시에 손주연 대표를 만나러 갔더니 생각보다 많은 복사비를 요구했다"며"돈도 없는데 그럴 수는 없다 싶어서 변영주 감독의 만 그때 당시 10만 원을 주고 샀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이어"출시된 비디오 중 일반인들이 모르는 영화 정보를 찾아서 화정동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 상영을 했다"며"이후에 열렸던 많은 상영회 같은 경우는 주로 출시되지 않은 영화들이 프로그램에 포함됐고 그때의 영화 자료들은 '문화학교 서울'을 통해 빌려왔다"고 덧붙였다. 이때 문화학교 서울에서 활동하던 88학번 같은 또래 조영각 곽용수 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1995년 이후 광주 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박상백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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