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방부 자리가 대통령 관저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의 제기들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용산 이전을 공식화한 직후인 3월 22일에는 용산구 향토사학자인 김천수씨의 연구 결과가 언론에 소개됐다.
남산 밑의 총독관저가 북악산 밑인 청와대 자리로 옮겨진 것은 1939년이다. 이 이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26년에 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지어진 이후로 '관저도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 일본인들로 인해 번영한 남산 밑 진고개 일대가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는 점과 더불어 이곳이 남산 남쪽이 아닌 북쪽이라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됐다. 이 보도가 나간 날인 12일 저녁 8시,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포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긴급명령 하루 전에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옛 본관의 철거를 지시했던 것이다.
'용산 아방궁'에서 동북쪽 500미터인 국방부 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하는 것을 두고 위의 은 1939년 총독관저에서 1910년 총독관저로 이사하는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남산 관저가 있을 때도 용산 관저가 사용됐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나온 를 보면, 서울역 남쪽인 남영역에서 그 아래인 용산역까지 대규모 군영이 조성돼 있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금의 국방부가 있는 자리에는 보병 부대와 군인 숙소 등이 있었다. 주변에도 온통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 용산 총독관저와의 거리를 재지 않더라도 이곳 전체가 일본군 군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총독관저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조선총독 지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지금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그때 당한 상처와 피해가 치유되지 않아,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관한 소송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서울역사박물관의 에 따르면, 둔지리 인근인 보광리에는 1915년과 1916년에 23가구 714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17년에는 298가구 1659명으로 급증했다. 그랬다가 1918년에는 209가구 1625명으로 줄어들었다. 용산 둔지리에서 쫓겨나 보광리로 옮겨간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케 하는 자료다.
이재명이 당선되어 윤석열 이 머저리 녀석처럼 대통령집무실을 국방부로 이전 한다고 했다면 국방부 내부에서도 안보를 운운하면서 똥별들이 발하고 옷을 벗겠다고 반발하고 조중동의 언론들은 국가시스템을 전혀 모르는 이 미친 짓을 왜 하며, 탄핵을 해야한다고 했을 것이다.
거기서 오염된 토양에 암에나 걸리면 딱~~좋겠다
검찰은 누구를 위해 무었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재의 모습은 자신들의 범죄를 덮거나 다시 뒤집어 오히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법죄전문가일뿐이다 검사의 권력을 가지고 돈버는데 사용할뿐 국민의 인권이나 정의를 공정한 법집행을 오히려 방해하고 조작하고있다 검찰이라는게 필요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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