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그의 출발은 아주 훌륭했다. 자신의 연수입을 모두 추기경들에 나눠주었고, 학자들과 서기들에게 일자리를, 선물은 많지 않았지만 모든 계층에게 예의를 다해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어떤 교황도 이렇게 훌륭하게 시작한 적은 없었다.
두 라이벌 강대국은 가만히 놔둬도 싸울 가능성이 많았는데, 교황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이러한 결정은 대단히 위험하다. 두 강대국 중 자기편이 아닌 나라가 승리할 경우 그 폐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러시아를 편들다 망한 것처럼…. 코냑동맹과 카를5세의 반격한편 파비아전투 1년 후인 1526년 2월 9일 프랑수아 1세가 부르고뉴와 제노바를 카를 5세에게 넘겨주고, 밀라노를 포기하며 어린 아들 둘을 인질로 맡기면서 풀려났다.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한 반-합스부르크 방위동맹을 프랑스 코냑에서 체결하였다. 교황청, 프랑스, 영국, 밀라노, 베네치아 등이 참가했다.
카를 5세의 독일용병과 이탈리아 공략카를 5세는 독일농민반란이 수습되고 오스만군도 헝가리에서 퇴각하자 이탈리아 공격을 개시했다. 1526.9월에 지난 3년간 교황의 비열한 행동을 조목조목 제시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란츠크네이트란 독일용병을 창설한 프룬츠베이크로 하여금 용병을 모집하게 했다. 프룬츠베르크는 카를 5세가 준 용병료가 많이 부족해서 아내의 보석 장신구와 개인 소유의 은식기까지 모조리 팔아 1만 2천명의 용병을 모집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약탈을 염두에 둔 전쟁을 의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군대는 루터파 교도가 많아 교황을 응징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들은 교황의 불신앙 때문에 온 유럽이 끈임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고 투르크에게 번번이 패배하며, 자신들도 가난해졌다고 믿고 있었다.
3월29일에 부르봉은 병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로마행을 선언했다. 교황에게 자신은 부하들을 제제할 수 없으며 평화조약은 끝났다고 알렸다. 병사들은 환호하며 중간에 피렌체를 들르지 않고 로마로 직행했다. 사령관이 죽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군대는 폭도로 변했다. 황제군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모두 죽였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피난처를 찾은 사람들도 죽였다. 사제, 수도사, 주교 등도 죽임을 당했고, 라파엘로의 그림이 전시된 방들이 마구간이 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몸값을 내야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부모들 앞에서 아이들을 높은 창문에서 던지려 했다. 황제군의 절반은 독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황과 추기경이 도둑이고 로마 교회의 재산은 여러 나라에서 도둑질한 것이라고 믿었다. 교회의 성스러운 그릇과 예술품들은 끌어내어 녹이거나 팔았다. 몸값을 내지 못한 추기경들은 고문을 당했다. 수녀들과 귀부인들도 겁탈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이런 상황이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 로마에 르네상스 시대 건물이 없는 것도 죄다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죄악과 탐욕, 로마의 부정부패 등이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동정심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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