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백남준은 해방 이후의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 사장의 아들이었지만, '경영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저버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선택했다. 백남준은 자신이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게 된 계기 중 하나를 17세 때의 홍콩 여행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국군과 별개의 군사 조직인 청년방위대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15일 편성됐다가 갑작스레 발발한 전쟁의 와중에 해체됐다. 조직 가동에 필요한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백남준의 아버지가 6·25전쟁 전년도에 무기 밀매에 관여했다면, 청년방위대와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이 국군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은밀한 활동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낙승은 이승만과의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 보유 달러를 특혜 대출받는 데 성공했다. 위 기사는 태창방직이 그 돈으로 구입한 시설이 삼성그룹 제일모직에 넘어갔다고 말한다. 백낙승은 그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 이는 정부의 상환 독촉 속에 태창방직이 기울게 된 계기였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7일 뒤에 발행된 1941년 12월 15일 자 총독부 기관지 에서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신원을 밝히고 해군기 제작비 7만 5천원을 헌납한 백낙승이 본인이 아닌 부인의 입을 통해 기부 소감을 세상에 알리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군수생산 책임자가 됐다. 또 조선업에도 진출했다. 같은 해에 강원조선철공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일본 정부의 관리하에서 선박을 제조하는 기업이었다. "해방 후 한민당에서 활동하는 한편 인민당 본부에 사무실을 제공했다. 특히 이승만과는 정치자금 기부 등을 통해 친분을 쌓았다. 1947년 12월 국제연합조선준비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최근 뉴스, 대한민국 헤드 라인
Similar News:다른 뉴스 소스에서 수집한 이와 유사한 뉴스 기사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