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재난과 함께 자랐다. 할머니가 한국 전쟁의 뿌리에서 태어나셨고, 대학생이던 어머니가 삼풍 백화점을 목격했던 것처럼 나의 학창 시절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분명 학교에서 '전원 구조' 소식을 들었는데, 학원을 마치고 다시 뉴스를 틀었을 때 세상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어두운 아나운서의 표정, 화면을 가득 채운 검은 바다, 차마 들을 수 없던 유가족의 절규까지.
시간이 흘러도 세월호 참사만 떠올리면 나는 다시 2014년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나만의 감각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때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면, 갑자기 취소된 수학여행에 투정 부리지 못했다면 당신도 느꼈을 무력감이다. 공동의 무력감을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어른이 된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위해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프로젝트 를 찾아갔다.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이해 안산청년네트워크, 안산YMCA, 평등평화세상 '온다' 등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3월 21일부터 4월 15일까지 11개의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했다. 플로깅을 하거나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고, 요가를 통해 명상하기도 하였다. 그중 지난 12일 진행한 에선 청년들이 모여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후의 사회를 되돌아봤다.4~5명씩 한 조에 묶인 청년들은 질문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각자의 기억은 달랐다. 누군가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며 뉴스를 보고 놀랐던 기억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이라서 피곤한 퇴근길에 스치듯 라디오로 들었다고 털어놨다.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던 나이도, 장소도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다음 질문에 청년들은 회의감을 드러냈다."세월호 다음이 이태원이잖아요. 압사라는 걸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도시 한가운데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 상상도 못 했어요.
똑같은 문장이라도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하겠다'는 문장을 두고도 각자가 생각한 '공감'의 기준이 달랐다. 누군가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고 잊지 않는 것이 '공감'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상대방의 아픔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달랐지만, 갈등은 건강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선언문을 뜯어고치는 청년들 덕분에 현장은 분주해졌다.그렇게 5가지의 '나의 약속'과 7가지의 '사회를 위한 요구'를 완성했다. 함께 큰 소리로 선언문을 읽으니, 무언가를 해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함께 나눴던 이야기가 일시적인 담론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당부와 약속이 되었다는 점에서 청년들은 뿌듯함을 느꼈다.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김없이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여전히 세월호,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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