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딜타이의 이 말은 얼추 춤에도 해당한다. 관객에게는 춤 자체가 제시되며 그것은 춤으로부터 설명되지 않고 대신 관객에게 이해하기가 던져질 뿐이다. 이해는 성서의 씨앗 비유처럼 좋은 땅에 떨어져 발아하여 성장하지만, 더러 길가에 떨어져 새에 먹히거나 발아엔 성공하나 흙이 깊지 않아 말라버린다. 무엇보다 춤은 발아와 무관하게 그저 씨앗을 뿌리는 행위에 국한하여야 한다. 무책임한 뿌리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얘기는 사족에 가깝다.4월 1~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 가 분류하면 이런 연극의 전형적 사례이다. 공연 제목이 '몸쓰다'이다. 무용이 몸쓰는 예술이니, 제목으론 사전정보를 매우 적게 준 셈이다. '쓰다'에서, 주최측의 요청 대로"쓰고, 쓰며, 닳도록 써버려, 소모되어 버린" 모종의 연상이나 전언을 상상할 수는 있겠다만 중의로 넘어가지 않고 단의에 머물면 그것은 그냥 '무용'이 된다.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전체가, 각자이자 함께하는 무대를 보여주려고 애썼을 텐데, 많은 토론과 협업 연습을 거쳤을 텐데, 관객은 부분이 스며든 전체만을 보게 된다. 당연히, 정교한 부분 없이 하나로서 완성된 무대를, 그것이 비록 스치는 인상이라 할지라도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동선은 내가 느끼기에 '10 대 1'로, 고립·고독과 함께 선지와 초월의 상을 행동한다. 표시 나는 방식으로 안경을 걸치고 활용한, 즉 안경을 쓴 그는 피날레 부분에서 상승하는 무대에서 독무를 춘다.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인상이 전체 공연에서 어떻게 녹아들었을지, 관객은 그의 존재를 어떤 '이해'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대다수 관객이 기억할 무용수는 박유라가 아닐까. 공연 내내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을뿐더러 막판의 기이한 비명 또는 처절한 울음, 하여간 객석을 관통하는 어떤 소리로 뚜렷한 기억을 주조했다. 음악이 아닌 유일한 음성."4차원 무용수"라는 박유라가 추상 기조인 현대 무용에 이번 공연이 의도한 구상 중 하나를 감각적으로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상은 또 다른 추상으로 되먹임하며 '이해'의 숙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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