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삶과 문학]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

  • 📰 newsvop
  • ⏱ Reading Time:
  • 58 sec. here
  • 2 min. at publisher
  • 📊 Quality Score:
  • News: 26%
  • Publisher: 63%

대한민국 헤드 라인 뉴스

대한민국 최근 뉴스,대한민국 헤드 라인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그날도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연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춘추복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중학생 소녀들이 무리 지어 교문 밖으로 나가던 오후였다. 그해 두발 자유화가 되어 소녀들의 머리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마야코프스키, 헤르만 헤세, 파스테르나크······ 우리는 기름에 구운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으며 전혜린의 일기에 등장하는 어려운 이름들을 더듬거나, 생물 시간에 있었던 개구리 해부, 영어 과제, 구두약을 발라 반짝반짝 광을 낸 친구들의 구두에 대해 소곤대며 이따금 창밖을 기웃댄다. 뒤늦게 교문 밖 비탈길을 내려오는 소녀들과 교모를 눌러쓰고 옆구리에 책가방을 낀 소년들과 목욕탕 쪽 주택가를 드나드는 행인들이 유리창 밖으로 드문드문 보인다. 해가 지기 직전의 수유리 골짜기는 적막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엘칸토, 에스콰이아 가죽 구두가 아니라서 윤이 나지 않는 친구와 나의 구두에도 늦은 오후의 붉은 빛이 스밀 때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간다.

그날, ‘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에 겨워 울고 있다’는 전혜린의 일기를 읽으며 먼 미래를 동경했을 내 친구 갈래머리 소녀는 훗날 그 따뜻하고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 땅바닥에 떨어진 참혹한 소식을 간직한 채 학생회관 옥상에서 몸을 던진 친구일지도 모르고, 시인이 되어 진회색 재의 시대를 증언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선생과 학생 누구도 학교 안에서는 함구해야 했던 '폭동'의 소문과 백색의 몸들이 뿌리고 간 무서운 진실 앞에 서서 나는 그 노랗고 붉고 검은 종이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그는 선전물을 뿌렸다. 총독부로 향하는 길에서 총검이 군중을 향해 돌진했다. 비탄의 울음소리와 함께 대열이 흩어졌다. 그날의 민족 봉기는 소도시와 장터와 마을까지 전파되었다. 대학생, 중학생, 상인, 노동자, 농민, 한국인 관리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도처에서 피가 흘렀다. 일본 경찰은 체포와 고문을 계속했고,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대학생들은 지하로 잠복해 비밀 행동에 들어갔다. 이미륵은 선전물 제작 일을 맡아 활동하다가 경찰에 쫓겨 고향 해주로 내려간다. 많은 학생이 국경 밖으로 도망치다가 사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청년 이미륵은 압록강을 건넌다.어머니는 안개 낀 어두운 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 멀리까지 아들을 배웅하며 조용히 말했고, 미륵이 만주에 머물다가 독일에 도착한 해 가을에 숨을 거두었다.

 

귀하의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귀하의 의견은 검토 후 게시됩니다.
이 소식을 빠르게 읽을 수 있도록 요약했습니다. 뉴스에 관심이 있으시면 여기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 6. in KR

대한민국 최근 뉴스, 대한민국 헤드 라인

Similar News:다른 뉴스 소스에서 수집한 이와 유사한 뉴스 기사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윤현식 “거대양당 기형적 정치구도 흔들려면 지역정당 합법화해야”지역소멸, 저출생, 돌봄, 노동 등 유권자의 삶과 직결된 시급한 문제에 대해 지금의 양당체제는...
출처: kyunghyang - 🏆 14.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4.18배 높은 사망률... 이 죽음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2023 홈리스 추모제 기획연재 3] 이름 없는 삶과 죽음은 없다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오이디푸스 탄생의 역사에는 성폭력이 있다세계 작가와의 대화에서 작가 르 클레지오가 들려주는 '신화와 문학' 이야기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이수경의 삶과 문학] 쇠는 녹슬지만 손톱은 자란다나희덕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출처: newsvop - 🏆 6. / 63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올해의 ‘아름다운 우리말 상표’는 ‘나들가게’…아름다운 가게·아침햇살·기죽지마 등도 수상특허청은 올해의 ‘아름다운 우리말 상표’로 ‘나들가게’를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특허청은 훈...
출처: kyunghyang - 🏆 14.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책&생각] 소설 후기에 새겨진 “매일 윤석열 욕하면서 지냅니다”소설 보다: 가을 2023김지연·이주혜·전하영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3500원 중단편 세 꼭지로 엮인 소설집 ‘소설 보다: 가을 2...
출처: hanitweet - 🏆 12. / 53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