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조선을 강타한 노출패션.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 주인공은 짧은 저고리 차림에 풍성한 폭의 치마를 허리에서 질끈 묶었다. 끈으로 묶어 올린 치맛자락으로 인해 흰 속옷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치 모델이 속옷패션을 선보이며 런웨이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김홍도의 ‘우물가 여인’은 저고리 아래로 가슴을 드러낸채 옆의 남자에게 두레박으로 뜬 우물물을 건네주고 있는 여인을 그렸다. |간송미술문화재단·국립중앙박물관 소장참일까, 거짓일까. 지난 21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 개최한 학술대회가 그 논쟁의 해법을 풀어보는 자리였다. 결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이다.
왼쪽은 세종 연간에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부인인 정경부인 성주 이씨의 영정. 윗옷의 품이 크고 치마폭이 넓고 볼륨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 마미군이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오른쪽 사진은 경기도 양주 남양 홍씨 묘 출토 치마를 복원한 모습. 역시 볼륨감있는 A라인 치마이다.|백산서원·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무슨 일화인가. 충숙왕은 친어머니가 몽골인인 의비이었다.몽골인의 피가 흐르고 있던 충숙왕이지만 고려인 부모를 둔 아들이 몽골인 행세를 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시 변발 차림이었을 것이다.
또 ‘열전·이연종’조는 “1351년 감찰대부 이연종이 공민왕의 변발과 호복을 두고 ‘이것은 고려의 풍습이 아니니 절대 본받지말라’고 간언했다”면서 “공민왕이 기뻐하며 변발을 풀었다”고 전했다. 이 글을 쓴 육용은 명나라 서울을 강타한 ‘마미군의 유행’이 영 마뜩치않은 듯했다. 육용은 “아랫도리에 허황되고 사치스럽게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심지어 ‘마미군을 입은 꼴불견 대신’들의 실명을 거론한다. 인천 석남동 출토된 15세기 치마의 경우 밑단 둘레가 450cm에 이른다. 경기 양주의 남양 홍씨 부부 합장묘 이장 때 출토된 치마는 그 폭이 아파트 2층 높이인 무려 550cm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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