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두 성을 잇는 탕춘대성까지 모두 표현된 중 ‘도성연융북한합도’. 숙종은 1711년 6개월간의 공사 끝에 북한산성을 완성했다. 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은 1753년까지 축조됐다. 이로써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가 완성됐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일각에서는 고종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항아리 12개에 담아 비밀장소에 매장했다는 소문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고종이 이 비밀자금으로 중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려다가 실패했고,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사이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24년, 이번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이었다. 인조는 할아버지처럼 도성을 버리고 충남 공주로 줄행랑쳤다.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섬긴 대가를 톡톡히 치른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도주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전에 청나라군이 들이닥쳐 우왕좌왕하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 역시 천혜의 요새라던 남한산성에서 50일 가까이 버텼지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강화도 역시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됐다. 그때까지 ‘조선의 2대 보장처’였던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더는 도성을 버릴 수 없다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예외없이 조선에도 불어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른바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1648년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 19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서울은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늘어서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침과 내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구한말의 북한산성 행궁 모습. 국왕이 거처하는 내전과 정사를 돌보는 외전, 그리고 행정의 외삼문이 보이고, 주변으로는 행궁을 보호하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수원 광교박물관 소장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산성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의 산영루 사진.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은 “포크는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 소장에서 인용,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은 “북한산성에 은 1만냥과 소금 50석,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다고 기록했다. 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고 보도했다. 아마 은과 소금, 숯 매장사실이 금괴매장설로 둔갑한 것으로 보인다.경기도와 서울시가 3개의 성을 ‘조선시대 도성의 방어체계’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한양도성’ 하나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지만 2017년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한양도성 한 곳이 아니라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연계해서 재도전하라고 권고했다.경기도 관할 구역의 경우 경기문화재단이 산성 4차례, 행궁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펼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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