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는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지 72주년 되는 날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 중국 국경에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한 달쯤 뒤인 10월 19일 중국군 2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맙니다. 전쟁은 그렇게 장기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중국은 왜 6·25 전쟁에 참전했을까요. 중국은 6·25 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다고 해서 '항미원조' 전쟁이라 부릅니다. 지금도 '미 제국주의에 맞서고 혈맹 관계인 북한을 돕기 위한 대결단이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두 번째로 제시한 해결책은 미군의 북진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일본에 있던 미군 12만 명 중 6만 명 또는 3개 사단이 6·25 전쟁에 참전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미군 부대가 부산과 마산, 목포로 상륙해 북진할 것으로 봤습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북한군이 더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 미군의 북진 길목인 대전과 금산, 대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스탈린에게 얘기했습니다. 소련도 북한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것인데, 미군이 북한군의 저지로 상륙을 못하거나 북진하지 못하면 중국이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제안 모두 중국은 참전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는 분석했습니다. 중국이 이 때만 해도 미국과의 충돌 등을 이유로 전쟁 참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국은 소련에 '공군 엄호'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열악하나마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 지원이 아닌 직접적인 엄호를 소련에 요청한 이유는 뭘까요. 지상군은 북한군으로 위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투기는 얘기가 다릅니다. 중국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에 출현하는 순간 중국의 참전 사실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때문에 중국은 소련에 '대신' 엄호를 부탁한 건데, 당시 소련도 한반도에서 미국과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공군 엄호를 소련이 승락할 리 만무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이 세 번째 제안은 결국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소련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이 또한 참전을 꺼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연구진은 해석했습니다. 중국, '미군 평양~원산에서 진군 멈춘다' 북한 정보 믿고 참전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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