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르완다 대학살 예견했지만 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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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은 식민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벨기에는 1916년 후투족과 투치족이 살던 영토를 임의로 합쳐 ‘르완다’라는 국가를 만들었고, 프랑스는 종족 갈등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르완다를 아프리카 내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골랐다.

“르완다인의 삶은 지정학적 게임의 장기말에 불과했다.”프랑스 정부가 1994년 8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은 르완다 대학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르완다 정부의 공식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르완다 정부는 프랑스가 르완다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학살 주도 세력을 도왔다고 밝혔다. 앞서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자신들은 학살 조짐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르완다에서 활동하던 국제인권연맹은 1993년 르완다 주재 프랑스 외교관에게 “투치족 2000명이 후투족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고 알렸다. 대학살이 일어나기 1년 전 이같은 조짐이 일어나고 있음을 미리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외무부로부터 돌아온 답은 “투치족의 르완다애국전선이 후투족을 자극해 일어난 사건임을 알고 있다. 프랑스가 그들 다툼에 개입할 순 없다”였다. 르완다 대학살 사건은 식민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1916년 벨기에는 후투족과 투치족이 살던 영토를 임의로 합쳐 ‘르완다’라는 국가를 만들었다. 벨기에는 식민 지배 시절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홀대하는 종족 차별 정책을 펼쳤고, 이 때문에 1962년 독립을 이룬 이후에도 후투족과 투치족의 물리적 충돌은 지속됐다. 1994년 4월 후투족 진영이었던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전용기 격추 사고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후투족은 이를 빌미 삼아 약 100일 동안 투치족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이후 투치족이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며 대학살은 끝을 맺었다. 카가메 현 르완다 정권 역시 투치족 진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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