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뛰어 들어온 아버지는 미처 신발을 벗지 못했다. 어머니가 급히 밥상을 차렸다. 아들은 마루에 신문지를 폈다. “워커화라고 하죠, 발목까지 올라오는 딱딱한 신발 있잖아요. 아버지가 워커화 끈을 일일이 풀고 묶을 시간이 없어서 제가 펴드린 신문지 위에 발을 얹은 채로 식사를 하셨어요.” 정원영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980년 5월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점점 거세지자 전남도경은 인근 지역 경찰서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함평경찰서에서도 경찰 55명을 보냈다. 정원영씨의 아버지 고 정충길 경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가 출동했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때였는데, 마지막에는 전남도청을 못 빠져나오고 며칠 동안 계속 경비를 섰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마지막 근무를 하던 5월20일, 열두 살이던 정원영씨는 친구와 함께 냇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시위대를 만났다.
당시 배씨는 현장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았고 “최루가스가 버스 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진술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1982년 12월 석방됐고, 1998년 7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가족들은 재판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근무한 경찰관 박 아무개씨가 집으로 찾아와 그날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었다. 정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이미 도청 앞은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대요. 그때 차라리 경찰부대가 못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경찰들이에요’ 하니까 시민들이 길을 터준 거예요. 시민들하고 경찰하고는 서로 악감정이 없었으니까요. 부대가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로 버스가 여러 대 통과했다고 하더라고요. 첫 번째 버스, 두 번째 버스까지는 지나갔는데 세 번째 버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경찰 저지선을 들이받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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