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흥영화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 대표는 지난해 5월 낙상사고를 당해 약 1년7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빈소는 같은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고인은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국 전쟁 때 피난길에 가족과 헤어지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1959년 한 무역업자의 제의로 라는 첫 영화를 제작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73년 의정부의 한 극장을 운영하면서 경기·강원 지역의 영화 배급을 시작했다. 1984년 부도 직전의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를 설립했다.그는 임권택 감독의 주요 작품들 대부분에 제작자로 함께 했다. 1984년 임 감독과 이 대표는 혼란에 빠진 세상을 방황하는 비구니가 주인공인 영화 를 함께 제작한 것을 계기로 연을 맺었다. 극중 주인공 비구니의 노출 장면 등이 논란이 돼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영화 제작은 중단됐으나, 감독과 제작자로서 두 사람의 여정은 이후 길게 이어졌다. 임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이 대표가 충무로 트리오로 활약하며 한국 영화사에 남을 역작을 여럿 남겼다.
2004년 경향신문과 인터뷰 할 당시의 임권택 감독,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정일성 촬영감독. 당시 20년 지기였떤 이들은 “돈보다 중요한 건 인연이고 꿈”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 , , 등 임 감독의 주요작품은 모두 이 대표가 제작한 것들이다. 는 1993년 단관 개봉한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은 제53회 칸 국제영화제에 한국영화 최초로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은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대표는 젊은 시절 명동에서 건달 조직생활을 했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을 마지막으로 제작 일선에서 은퇴했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의정부 소재 태흥시네마를 운영하고 태흥영화사가 보유한 저작권을 관리하면서 노후를 보냈다. 총 3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 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제작자상,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등 각종 훈장과 상을 받았다. 2002년 7월8일 임권택 감독과 함께 문화공로 훈장을 수상한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연합뉴스
자네. 지금 깊은 심연에 있는가 언젠가 또 다시 빛을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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