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이희승은 학원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정치에 참여한 교수들도 있었지만, 이희승은 현실 정치와 담을 쌓은 남산골의 선비였다. 혁명 후 정계는 크게 요동쳤다. 학교 안팎에서 더러는 과격한 주장과 행동을 하는 학생들의 활동도 있었다.
"5·16 직후 어느 일요일 나는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지만 잡무가 있어 학교에 출근했는데, 형사들이 학장실로 찾아와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처럼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경찰에서는 대학교수단 모임에 참가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1961년은 그의 생애에서 희비가 갈리는 해였다. 아직 심신이 강건했으나 급조된 법에 따라 정년에 걸려 학교에서 강제로 밀려난 것은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시집 과 그가 스스로"생애 최대의 역저"라 평했던 출간은 이런 아픔을 잊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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