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기독교와 함께 3·1운동의 중추 세력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5명이 천도교인이었다. 16명인 기독교와 쌍벽을 이뤘다. 동학에서 기원한 이 교단의 전국적 조직망이 1919년 만세운동 폭발의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한 최린은 한학 공부를 거쳐 24세 때인 1902년에 지방 통상 부서인 길주감리서의 주사로 취임했다. 그 뒤 대한제국 유학생이 되어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들어가고,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의 친일은 '악명이 높았다'보다는 '매우 두껍다'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전체 25권에 수록된 친일파 숫자는 1006명이다. 이 보고서는 친일파 1명에게 평균 20쪽 미만의 분량을 할애한다. 그런데 최린에게는 91쪽을 배당했다. 그가 일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91쪽'이나 필요할 정도로 왕성하게 친일한 그는 명함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친일을 위해 역임한 직책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번잡하다. 몇 개만 열거하면,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사 사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배영동지회 상담역, 조선유도연합 상임이사 등등이다. 이들은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 중노동 하는 현실과, 식사 제공에 3원 내지 7원의 월급을 받는 현실 때문에 파업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최린이 받은 중추원 참의 월급 150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는 1941년에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됐고, 이때부터 1945년까지는 연봉 2400원을 받았다. 친일재산을 축적했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최린이 자치론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변신해 위와 같이 제국주의 밥을 먹고 사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이 너무 강해져 조선 자치의 실현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그를 일본에 대한 굴종으로 몰아간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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