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 📰 joongangilbo
  • ⏱ Reading Time:
  • 47 sec. here
  • 9 min. at publisher
  • 📊 Quality Score:
  • News: 46%
  • Publisher: 53%

신복룡의해방정국산책 뉴스

상하이임시정부,이승만,김구

「 〈제1부〉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 「 ② 상하이 임시정부의 비극 」 이제까지의 3·1운동사 연구는 민족 정기와 진압 과정에 매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시정부로서는 일국의 대통령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고, 결국 아예 대통령이 자신의 임의대로 직책을 함부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대한민국 임시 헌법’(1919. 9. 11.) 제16조에 ‘임시 대통령은 임시의정원의 승낙 없이 국경을 함부로 벗어나지(擅離) 못함’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우선주의에 따라 활동하던 시기에 지난날의 은사인 미국의 대통령 윌슨(W Wilson)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 통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 1946년 8월 15일 열린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함께한 우남 이승만 과 백범 김구. 중앙포토

3·1운동 후 조국을 떠난 지사들 이제까지의 3·1운동사 연구는 민족 정기와 진압 과정에 매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지만 달리 보면, 경제적 민족주의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개명, 공화주의, 동양 평화, 그리고 그 총화로서의 독립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담은 3·1운동은 매우 복잡다기한 측면을 담고 있다. 시위의 폭풍이 지나간 다음 당대 지식인들은 다소 허무한 심경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회한에 젖었다. 지식인들에게는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 있다. 무저항 투쟁은 옳았나? 그렇게 민중을 이끈 지도부의 판단에는 오류가 없었나? 우리는 과연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역량을 갖췄나? 하는 회한은 민족 정기를 드높였다는 것만으로 덮어둘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 인구는 1700만 남짓했는데, 그 가운데 103만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전 국민의 6.1%에도 미치지 않았다. 장기 후유증으로 사망한 숫자를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940명 정도가 죽음을 겪었으니, 우리가 피상적으로 “2000만 동포가 모두 일어났다”는 표현은 여염의 이야기일 수 있다. 반면에 전국 220개 군현 가운데 211개소에서 봉기했으니, 그런 면에서는 거족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사자나 유족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결국 3·1운동은 그 최종 목표인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라는 사실이 지식인들을 괴롭혔다. 왜 한국의 시민혁명은 좌절됐나? 일제의 통치는 ‘헌병 정치’라는 독특한 형태였다. 식민지 통치의 모델인 영국의 자치 정책과도 다르고, 오랜 시간에 걸쳐 냄비 속의 개구리 죽이듯 하는 중국의 동화 정책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일본은 도서 민족으로서의 폐쇄공포증이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 같았으며, 종교적 죄의식이 없는 민족이어서 피식민지 국가의 저항을 용서하지 않았다.

상하이임시정부 이승만 김구 임시의정원 위임통치 김구 이승만 신복룡

 

귀하의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귀하의 의견은 검토 후 게시됩니다.
이 소식을 빠르게 읽을 수 있도록 요약했습니다. 뉴스에 관심이 있으시면 여기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 11. in KR

대한민국 최근 뉴스, 대한민국 헤드 라인

Similar News:다른 뉴스 소스에서 수집한 이와 유사한 뉴스 기사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민 광장에 학살자 동상을 세우겠다고?[수산봉수 제주살이] 광장의 주인은 이승만·박정희가 아니다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시드니 교회서 10대 소년 흉기난동...경찰 “종교 테러”쇼핑몰 흉기 난동 발생한지 이틀 만에 주교·신부 칼로 찔리는 장면 생중계돼
출처: maekyungsns - 🏆 15.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9) 고려대 호랑이상4월18일은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4·18 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각지의 자연발생적 시위로 폭발했는데, ...
출처: kyunghyang - 🏆 14.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반도체 ETF 차별화 … 메모리가 수익 갈랐다AI대장주 엔비디아 조정에미국반도체 ETF 수익률 부진한달새 30% 오른 마이크론11% 상승한 SK하이닉스 등메모리 비중 높은 상품은 순항게티이미지뱅크
출처: maekyungsns - 🏆 15.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미주 거주 독립운동가 후손들 '이승만 우상화 작업 당장 중단하라'안창호 후손 필립 안 커디씨 등 12명... "독립운동 영웅으로 기념하는 것은 역사 왜곡"
출처: OhmyNews_Korea - 🏆 16. / 51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유성운의 역사정치] '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목전에 둔 1953년 6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 참석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날 한국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에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후엔 문맥 편의상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줄여서 호칭하겠습니다.) . - 이승만 대통령,아이젠하워 대통령,한국전쟁 휴전협정
출처: joongangilbo - 🏆 11. / 53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