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명선 소위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용은리 어귀에서 지프차를 멈췄다. 차에서 내린 그는 논에서 일하는 노인들에게 손나팔을 하고 외쳤다."어르신. 여기 박용순 동무네 집이 어댑니까?" 노인들은 지프차에 탄 젊은 군인이 낯설었지만 경계하지 않고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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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흥천초등학교 교장 성관식과 전 흥천면장 이근덕, 금사면 이포리 최병화, 최영찬, 김성한과 능서면 매류리 민치복이 죽임을 당했다.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이가 있었으니 여주읍의 노학수와 능서면 매류리의 박용순이었다. 총에 맞고 건지미골짜기에서 신음하던 박용순을 다음날 여주읍에 들어온 인민군이 발견했고, 인민군 군의관이 수술을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50년 9월 24일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유엔군이 여주땅을 다시 밟았다. 인민군이 여주에 들어온 때가 7월 4일이니 만 80일만의 수복이었다. 그동안 여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주군에는 군·면·리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북한군의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 북한식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지만 전쟁으로 인한 공출과 짧은 인민군 점령 기간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이후 행적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아내 용인 이씨와 아들 박준원도 매류리 고령토구덩이에서 부역혐의로 학살되었다. 박용순의 동생 박용옥은 월북을 시도하다가 경기도 광주군 석바다에서 사살 당했다. 이천수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다녔던 박용술은 인공 시절 경기도 인민위원장을 했다고 한다. 수복기에 그는 부모와 함께 월북했다. 같은 마을 박용만도 어머니, 남동생 박용조와 여동생 박용분을 데리고 북으로 갔다. 물론 용은리의 전쟁 피해가 박씨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이병기 가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병기와 그의 아내, 아들 이시현과 그의 동생 세 명까지 해서 총 6명이 공동묘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18세 이상 남자들은 전부 모이시오"라는 전갈에 이천호는 마을 회관으로 갔다. 회관 안에는 능서면 부인민위원장 박천원과 그의 아버지 박용달, 그리고 여성동맹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18세 이상 남성들이 회관 밖에까지 길게 줄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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