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명리와 출세의 욕망을 헌신짝 여기 듯 하며 도학자로서 부패한 정치를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 선비의 책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인물, 과거에 합격하고도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유능한 제자들을 키웠던 처사.
30살이 되던 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인 김해의 단동에다 산해정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남명은 생활이 곤궁했으나 생계에 긍긍하지는 않았다. 주의에서 과거에 응시하고 출세하라는 권유도 못 들은 채 했다. 남명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요망한 책'이라고 멀리했던 에서 호를 취한 것부터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세속의 기준이나 세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식의 호는 이상향인 남녘 바다를 날아가는 '대붕'을 뜻하여, 이것은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과 안민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다."그러나 어찌 두류산만이야 하리남명의 도량이 이 정도였다. 천석들이 종을 칠 수 있는 큰 '북채'가 되고자 하였다. 1539년 조정에서 헌릉참봉에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했다. 1549년에는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조정은 1555년 에 그의 높은 학덕을 사서 단성 현감을 제수했다. 이를 받을 인물이 아니었다.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내직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당파와 권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고,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남명은 문인이면서 칼과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명을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하는 것은 경이고, 밖으로 의를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경과 의는 그의 선비정신과 실천철학의 중심가치였다. 이후 '경의' 두 글자는 "하늘의 달과 해처럼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퇴계의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남명의 철학은 보다 실천적이었다. 하여 임진왜란 당시 남명 문하에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고, 강직한 제자들이 많아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잇따른 상소 등으로 크게 탄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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