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만주 고구려 유적 일대 뒤흔들던 항일투쟁 기록 나왔다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16.2.2020

일지가 발견되면서 만주 고구려 유적은 20세기 초 항일투쟁 무대로서의 의미도 갖게 된 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 1938년 일본인 시치다의 ‘집안행’ 정인성 영남대 교수 입수·공개 압록강변 지안의 고구려 고분군 현장 연구자가 맞닥뜨린 항일투쟁 중국공산당·조선인 빨치산 부대가 일본 군·경과 벌인 전투 생생히 고분 용마루 기와, 무용총 철못 등은 지안 유적의 고고학적 정보 드러내 1930년대 고구려 고분인 삼실총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 짚풀 등을 깔고 만든 취침 자리의 흔적이 보여 당시 지안 일대에 출몰하던 항일유격대의 임시 거처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구려 개마무사와 신수를 그려놓은 벽화도 보인다. 1938년 지안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현지 조사보고서인<통구>에 실린 사진이다. “아버지는 80여년 전 만주 지안(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서 상세한 현장 일지를 남기셨어요. 그 뒤 집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2019년 7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고고학자 시치다 다다아키를 만난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뜻밖의 내용이 담긴 낡은 노트 하나를 건네받았다.<집안행>이란 제목을 붙인 20×16㎝ 크기의 작은 노트. 28장으로 된 속지에는 시치다의 아버지 시치다 다다시가 1938년 5월17일부터 같은 해 7월5일까지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지 퉁거우(통구)현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조선고적연구회 사업으로 조사할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정 교수가 소스라치게 놀란 건 일지에 지안의 고구려 고분군을 배경으로 출몰했던 항일유격대의 전과가 다수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치다는 그들을 ‘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일지는 당시 중국 공산당과 조선인 빨치산 부대의 습격으로 지안 일대의 치안이 안정되지 않아 일본 연구자들이 지극히 불안해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치다 다다시가 1938년 기록한 만주 지안 고구려 유적 답사일지<집안행>의 표지.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인 ‘소화 13년 5~7월’이란 작성 기간이 제목 밑에 적혀 있다. ‘성내로 들어와 지안 여관에 묵었다 … 문 앞 트럭 수대에 분승한 경찰대가 비적 토벌을 위해 출발하려는 장면을 조우했다. 기합이 빠진 듯한 경관,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5월17일) ‘17호분, 사신총, 이실분 공사감독. 목수에게 명령해 급하게 고분 문짝에 열쇠를 달아 석실의 무단 침입을 저지’(6월3일), ‘밤 11시 무렵 현공서로부터 비적 상황이 악화되었기에 … 경무장하고 집합하라고 연락 옴 … 군장을 한 채로 모포를 배에 올려두고 취침’(6월11일) ‘오전 1시, … 긴장한 목소리에 잠이 깸 … 비적의 습격이 … 기관총 소리 시끄러움. 유격대 황급하게 출동 … 다시 잠들 수 없었음 … 토구자 끝의 이마이구미가 습격을 당해 방인(일본인) 다수 참살, 납치되었다고 한다 … 약 6할 정도가 조선인이라고 하는데 (밥해주는) 노파는 창자를 드러낸 채 참살됐다고 … 아이를 가진 부인 3인은 불쌍하다고 여긴 여자 비적의 동정으로 돌아왔음 … 돌격대의 아이는 일본인은 바카바카(바보)라고 했다 함. ‘간도에서 일본군이 … 우리들의 부모·형제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죽였다’고, ‘일본인은 귀축(鬼畜)이다’라고 했다고’(6월20일) ‘비적 300명, 오전 12시30분 무렵 동강 습격 … 엄청나게 요란한 사이렌, 현공서로 피난 남자는 무장하고 각자 경비에 임함 … 비적은 두 갈래로 갈라져 … 한무리는 장군총 뒤쪽으로, 한무리는 동대자에서 계아강 계곡 길로 나와서 도주. 기관총과 소총 소리가 격렬함’(6월24일), ‘대성(大城)에 비적 습격’(7월1일) 일지<집안행>의 본문 내용 중 일부. 1938년 5월17일의 기록이다. 기록에 나오는 토구자, 동강 등의 낯선 지명은 모두 고구려 유적 부근의 마을이다. 내용이 현장 르포를 보듯 구체적이고 박진감 넘친다. 항일유격대 추정 세력이 만주 고구려 유적 부근에서 벌인 전투의 현장 기록이 나온 건 시치다의 기록이 처음이다. 정 교수는 “조사단이 치안 불안으로 철수하기 직전 ‘대성’ 자체가 습격받았다는 일지 기록이 나와 지안을 유격대가 해방구로 점령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시치다가 1938년 일본 고고학 잡지에 실은 보고서에 이들을 ‘공산 비적’이라고 했고 만주 동변도에서 주력이 이동해왔다고 밝혀놓아 공산계열 무장세력이 1938년께 지안으로 옮겨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1930년대 만주국 시절, 퉁거우현 지안 일대의 지도. 일지를 공개한 시치다 다다아키는 사가 박물관 전 관장으로, 한국 학계에는 일본의 세계적인 고대 주거 유적 요시노가리를 조사한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부터 동북아역사재단 프로젝트로 일본 속의 고구려 관련 유물·기록을 조사해온 정 교수가 현지 학자의 귀띔을 받아 그를 접촉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근대 사료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1930년대 간도와 압록강변에서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자가 힘을 합쳐 동북 항일연군을 결성하고 빨치산 유격활동을 벌인 사실은 북한 주석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과도 직결된다. 당시 김일성이 관여한 빨치산 투쟁의 가장 유명한 성과가 1937년 압록강변 보천보 마을 습격 전투다. 발굴된 일지는 중국과 북한 사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보천보 전투에 필적할 정도로 치열했던 항일유격대의 활약상을 일본인의 기록으로 실증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시치다의 일지가 발견되면서 만주 고구려 유적은 20세기 초 항일투쟁 무대로서의 의미도 갖게 된 셈이다. 1930년대 일본 조사단이 찍은 당시 압록강변 퉁거우 지안의 들머리 풍경. 고구려성을 바탕으로 만든 성벽이 잘 남아 있고, 왼쪽에 출입하는 성문과 누각이 보인다. 정 교수가 확인한 시치다 일지와 그가 당시 일본으로 가져온 지안 출토 유물은 지금까지 몰랐던 지안 고구려 유적의 고고학적 정보도 상당수 알려준다. 태왕릉 남서쪽 건물터에 다량의 적색 기와 무지 건물터가 있다는 기록이나, 고구려 왕릉급 고분에 쓰인 용마루 기와 쪽, 무용총에서 출토됐다는 철 못 4점은 특히 주목된다. 이외에 일본 나라현 덴리대 부속 도서관에 보관된, 고구려 벽화 모사의 선구자 오바 쓰네키치의 평남 진파리고분 조사 관련 자료를 처음 찾아내 소개하고, 일본 소장 고구려 기와(와당)의 전모를 평가하고 분석한 점도 성과다. 상세한 내용은 재단에서 최근 펴낸<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연구Ⅴ>에 실려 공개될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정인성 영남대 교수 제공 후원하기 응원해주세요, 더 깊고 알찬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 진실을 알리고 평화를 지키는 데 소중히 쓰겠습니다. 응원합니다 연재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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