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 도화선이 됐던 고 이한열 열사가 살았던 집. 정대하 기자 지난 10일 오후 찾은 광주시 동구 지산동 고 배은심 여사의 집 안팎엔 적막 만이 흘렀다. 마당 한쪽으로 오래된 호랑가시 나무가 겨울 볕을 받아가며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이한열 열사가 네살 때인 1970년부터 살던 집을 어머니는 평생 지켰다. 최근 집을 수리하면서 큰길로 새 문을 냈지만, 옛 작은 문은 그대로 뒀다. 지난 8일 고인이 세상을 뜨기 직전 이 집을 찾은 김순 광주전남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어머니는 항상 ‘아직도 한열이가 집 문을 열고 금방 들어올 것 같다’고 하셨다”며 “‘왜 집에 와서 밥을 먹지 그랬냐’고 하시며 정겹게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이렇게 황망하게 가실 줄 몰랐다”고 말했다. 고 이한열 열사가 자랐고 배 여사가 50년 남짓 살았던 지산동 집이 앞으로 ‘역사 교육관’으로 조성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고인은 동구에서 자택을 역사공간으로 활용하려는 계획과 관련해 ‘아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때문에 주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순 집행위원장은 “어머니도 머무를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역사공간 만드는 일을 진행하자고 하셨지만, 공간을 만들면 일단 그 집을 비워줘야 하니까 결심이 쉽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아직 결정된 게 없다”며 말을 아꼈다. 김순 광주전남추모연대 집행위원장. 고인은 아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피격당했던 1987년 6월9부터 세상을 떴던 7월5일까지 일을 파노라마처럼 기억했다. 그리고 해마다 그 시간이 오면 극심한 고통을 앓았다. 고인은 2017년 3년상을 치르는 세월호 유족들에게 “여러분은 3년이 됐는데 난 30년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다’고 하는데 30년이 되도 똑같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슬픔을 딛고 전국 곳곳의 민주화 시위와 사회적 약자의 집회에 참여했다. 그것이 아들의 뜻을 잇는 길이라고 여겼다.
역사교육관 됐음 좋겠어요. 아들을 잃고 평생 그리움을 안았을 저 마당에 풀만 나게 할 순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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