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가을 광주 지산동 자택에서 찍은 배은심 어머니·이한열 열사 모자의 마지막 생전 사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너는 곧 돌아올게요, 라고 말했지. 네 침대 위에 있던 시든 잎들을 거두고 네 유품들을 천으로 덮었다. 하얀 천 위에 흰 자작나무가 놓여 있네. 아가, 봄이 왔다’ 1919년 2월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일기 한 대목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3·1운동 전야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는 전장으로 불려 나간 18살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다. 이후부터 그는 아틀리에 예술을 거부하고 삶의 고통, 그 도저한 밑바닥을 형상화한다. 지극한 모성은 파시즘의 광기가 코로나19처럼 창궐하던 시대에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연대와 공감의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이한열은 21살, 유독 이마가 환하게 빛나는 청년이었다. 가슴에는 군사독재를 향한 시퍼런 의분이 들끓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야 한 발짝 한 발짝씩 온다’고 한 편의 시 같은 말도 남겼다. 배은심의 발걸음은 단순히 아들의 한에 머물지 않았다. 노동 현장, 세월호의 어린 원혼들이 배회하는 곳 등을 함께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고투하는 현장이면 늘 배은심 어머니가 있었다. 1985년 5월, 광주학살의 책임을 처음으로 드러내놓고 5공정권에게 추궁한 ‘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을 계기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가 결성되고 이후 기존 양심수들과 함께 ‘민가협’이 출범했다. 실로 무수한 어머니들이 거리의 집회 현장, 농성장, 감옥의 면회 투쟁, 시위 현장을 가장 뜨겁게 달구었다. 성고문 피해자를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팔아먹는 좌경분자’로 매도하는 검사를 향해 신발과 잉크병을 던지다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청년들이 일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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