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천계영 “목소리로 그리는 웹툰 제작 생중계···기술이 저만의 ‘살길’됐죠”

김지혜 기자
마이크와 트랙패드, 마우스를 이용해 웹툰을 제작하고 있는 천계영 작가. 넷플릭스 제공.

마이크와 트랙패드, 마우스를 이용해 웹툰을 제작하고 있는 천계영 작가. 넷플릭스 제공.

‘순정만화의 전설’ 천계영(49)의 시절은 저물지 않는다. 만화책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1990년대의 독자도,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을 스마트폰으로 넘겨보는 2019년의 독자도 모두 지지 않는 ‘천계영 월드’의 ‘현재형 소녀’들이다. “새로운 것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의 천성 덕에 천계영 작가는 1996년 데뷔 후 23년 동안 늘 참신한 서사와 첨단 기술을 접목한 작업 방식으로 변화를 선도해왔다. 그런데 이 적응의 천재에게도 버거운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해 5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악화된 손가락 퇴행성 관절염으로 찾아온 통증 탓에 ‘일할 수 있는 손가락’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전술했듯, 천계영의 시절은 저물지 않는다. 손 대신 ‘목소리’를 통해 <좋아하면 울리는> 164회를 그리고 있는 천 작가를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아니야~” “됐냐?” 컴퓨터와의 입씨름 끝에…

“은퇴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요. 처음엔 종양을 암으로 진단 받아 곧 죽는 줄만 알았거든요. <좋아하면 울리는>을 제 손으로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친한 작가를 불러 결말을 알려줄 정도로요. 지금은 더디긴 하지만 제 힘으로 완결을 향해 갈 수 있게 됐어요. 좌절감이나 답답함은 느끼지 않아요. 매일매일 너무 재미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전 세계 190개국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의 원작인 동명의 웹툰을 천 작가는 다음 웹툰에 2014년부터 5년 째 연재 중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반경 10m 안에 들어오면 알람이 울리는 ‘좋알람’ 애플리케이션(앱)이 개발되고, 알람을 통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상에서 펼쳐지는 세 남녀의 로맨스를 다룬 이 작품은 9월 현재까지 누적 조회수가 4억7000만회에 달할 만큼 인기가 높지만 천 작가의 손가락 관절염이 악화되면서 지난해 3월 이후 휴재 상태다.

“통증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어요. 손가락을 종이로 베이는 것처럼 아파, 진짜 종이에 베여도 모를 정도로요. 증상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휴재가 거듭될 수록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진 탓에 무리하게 작업을 이어갔던 게 독이 된 것 같아요.” 마우스를 쥐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작품 연재를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부랴부랴 찾은 곳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의자에 앉을 만큼 몸을 회복한 이후부터는 아마존에서 사들인 수많은 기계들을 뜯어보는 게 일이었죠.” 발 마우스, 펜 타입 마우스, 한 손 키보드, 악력 강화 장갑 등 온갖 종류의 입력 장치를 시도했지만 모두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컴퓨터 운영체제에 내장된 장애인용 음성 인식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천계영 작가는 음성 인식 기술과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통해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제작 과정을 유튜브를 통해 매주 생중계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천계영 작가는 음성 인식 기술과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통해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제작 과정을 유튜브를 통해 매주 생중계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작업 도우미’로 마이크가 낙점된 순간이었다. 새롭게 설계된 그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프레임 한 개.” 컴퓨터에 연결된 마이크에 대고 말하면. 포토샵 화면에 네모난 빈칸이 생긴다. “왼쪽 말 칸”을 외치니 칸 왼쪽에 말풍선이, “보통 대사”를 말하니 문자 입력창이 뜬다. 대사를 읊어 입력했다면 이제 그림을 그릴 차례다. “봉식이 찾아줘”를 외치자 4D 시네마 프로그램에 3차원으로 모델링해 둔 다양한 자세의 남자 캐릭터들이 화면에 뜬다. 표정과 고개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해 “그려줘”를 외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만화 캐릭터가 완성된다. 일에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는 실수와 오타가 잦다. 그럴 땐 실행 취소 단축키인 “Ctrl+Z”를 누르는 대신, 타이르듯 “아니야~”라고 말하면 된다. 매 프로세스를 완료할 때마다 “됐냐?”라고 말하는 컴퓨터와의 입씨름 속에서 <좋아하면 울리는>의 새 회차가 완성돼간다.

천 작가는 이같은 작업 과정을 지난 6월부터 매주 목요일 밤 9시,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하고 있다. “6개월 만에 163회 한 편을 완성했어요. 지금은 더디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죠. 164회는 한 달 안에 완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1주일에 한 회 연재되는 웹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여정이 예상되지만, 천 작가는 생중계를 지켜보는 시청자 수백명의 응원 댓글을 벗삼아 묵묵히 나아간다. “독자들에게 언제쯤 다시 연재를 재개할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기약없이 기다리게 할 바에, 내 상태가 이렇다고 솔직하게 알리고, 독자와 함께 한 회 한 회 마감해 간다는 생각으로 유튜브 중계를 시작했는데 잘 한 선택인 것 같아요. 다같이 ‘으쌰으쌰’ 해나가는 것 같아 재밌어요.”

■부딪힌 ‘재능의 벽’…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 KyeYoungChon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 KyeYoungChon

이것이야 말로 만화의 최첨단 아닐까. 돌이켜보면 천 작가의 작품은 항상 당대를 반발짝 앞서 나갔다. 데뷔작 <언플러그드 보이>부터 손수 스크린톤을 붙이는 대신 포토샵으로 명암 등을 그려내면서 ‘파격’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다. 차기작 <오디션>에선 당시만해도 선례조차 없었던 음악 경연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보이더니(<슈퍼스타K>는 물론 <아메리칸 아이돌>보다도 앞섰다) 이후 작품부터는 3D 모델링으로 2D 만화의 배경·캐릭터 구축하는 신기술을 사용했다. 그는 “‘기계가 할 수 있는 걸 굳이 사람이 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구심을 늘 갖고 있다”면서 “그림에 대한 ‘재능의 벽’을 빠르게 인정하고 저만의 ‘살길’을 찾았던 과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천 작가는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잘 그리는 법’을 다룬 책이란 책은 다 읽었다. 수면 시간을 4시간으로 줄였고, 화장실도 뛰어갔다 올 정도로 연습에 매달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여기서 더 늘 수가 없다는 것을 사실로 확인했지만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정말 힘들거든요.” 결단 끝에 빠르게 찾아나선 ‘살길’이 바로 ‘기술’인 셈이다. 한계 지점까지 나아가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한 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까지…. 온통 험난하기만 한 만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을까.

“그림을 싫어한다는 저의 표현은, 사실 제 머릿속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을 다 담아내지 못해 느끼는 아쉬움을 의미해요. <오디션>이 그런 면에서 제일 아쉬운 작품이예요. 그만큼 제가 가진 이미지가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현실과의 격차를 좁혀나가는 것도 오로지 제 몫이에요. 만화 외의 다른 장르에 도전하기 어려운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선 타인과의 협업이 필수잖아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들어진 <좋아하면 울리는> 감상 소감을 물었다. 그는 환히 웃으며 “100% 이상 만족한다”고 말했다. “작품이 가진 통속적인 면모보다는 어둡고 현실적인 부분을 잘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에요. 이나정 감독님께 매일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좋아하면 울리는>은 ‘첫사랑’하면 느끼는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뿐만 아니라 비참함과 잔인함, 괴로움까지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웹툰 특유의 만화적 색채를 약화하는 대신, 원작에 등장한 ‘좋알람’이라는 앱을 실제로 사용하는 등 현실감을 높여 호평을 받고 있다. ‘좋알람’ 앱은 천 작가가 창업한 회사 러브 알람이 개발한 것으로, 원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적극 반영된 청량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사용됐다.

좋아하는 감정을 측정해서 알려주는 앱이라니, 기술을 사랑하는 천 작가다운 설정이다. “처음엔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 삼각관계라는 만화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세 명의 남녀가 얽힐 때 발생할 수 있는 관계의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니 4의 3승더라고요. 그러다 기왕 이렇게 수학적으로 갈 거면 차라리 ‘좋아하는 감정을 알려주는 스마트폰’ 같은 소재가 좋겠다고 생각했죠. 세 사람이 동선이 얽혔으면 해서 ‘반경 10m’라는 조건이 추가됐고요. ‘좋알람’은 의지만 있다면 지금 과학기술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반할 때’ 나타나는 특정한 신체적 변화가 있잖아요. 눈알이 빠르게 굴러가거나, 솜털이 쭈뼛서는 것 같은 일이요. 이런 생물학적 반응을 측정해서 알려주는 이런 앱이 진짜 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몰라서 좋은 것은 딱히 없잖아요?”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 KyeYoungChon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한 장면. ⓒ KyeYoungChon

‘천계영 월드’는 지금도 착실히 건설되고 있다. 천 작가는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세평 남짓한 작업실에 꼬박꼬박 출근한다. 고양이 시즈니도 종종 함께한다. <좋아하면 울리는> 완결 이후 계획까지 이미 세워뒀다. 음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유튜브 연재 만화를 고민 중이다. “그림과 글을 통해 누군가의 감정을 움직있 수 있다면, 그 매체와 형태가 무엇이든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순정만화’ 작가라고 정해두진 않았지만, 언제나 청소년기의 어린 여성을 위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소녀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고, 그러지 못해서 미안한‘언니의 마음’으로 늘 일에 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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