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1일부터 모금 중인 이승만기념관 후원금이 11월 중순 들어 6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의 높이만큼이나 모금액도 올라가고 있다. 꼭 선행을 해야 후원금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악행의 덕을 입은 세력과 그 계승자들이 많을 경우에도 악인에 대한 후원금이 많아질 수 있다.
이 코너에 따르면, 최능진은 대한제국 선포 2년 뒤인 1899년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했다. 일제 강점 5년 뒤인 1915년에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고, 중국 난징(남경) 진링대학(금릉대학)을 거쳐 1917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듀크대학과 스프링필드대학이 그의 학교가 됐다. 전공은 체육학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런 활동은 시련이 됐다. 일제가 벌인 공안사건에 최능진도 휘말려 들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침략을 확대하고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이로부터 1개월 전인 그해 6월 8일, 일제는 이광수·주요한 등을 전격 연행하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켰다. 지식인 181명을 민족주의 활동을 이유로 검거하는 대형 공안 사건이 시작됐던 것이다.
하지만 그달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우파 조직인 평남지부는 해체됐고, 최능진은 다음 달에 38선을 넘게 됐다. 1991년 1월 25일자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제56회 최능진 편은"9월 15일 소련군을 속여 2대의 트럭을 빌려 4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운명이 펼쳐질 서울로 향한다"라고 서술했다. 위 에 따르면,"일제강점기 때의 고등계 형사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산 것이 대구항쟁의 원인이라고 그는 공개 석상에서 지적했다. 이는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찰의 사기 진작을 저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사표를 요구해 그해 12월 9일 그가 경찰복을 벗는 결과로 이어졌다.그렇게 쫓겨난 최능진은 이승만 정권에 적극 대항했다.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맞서고자,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구하는 김규식을 자주 접촉했다. 1948년 5·10 총선 때는 이승만의 당선을 막고자 저격수를 자처하며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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