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포스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부모님은 “여자는 축구를 하면 안 된다”며 각종 미인대회에 출전시켜 축구와 거리를 두게 했다. 미인대회 우승을 독차지했던 캄포스는 그 덕분에 1966년 브라질의 축구클럽 크루제이루 홍보 담당자로 취직했다. 축구클럽에서 일하다 보니 축구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결국 이듬해 심판 훈련을 받고 자격을 갖췄다. 캄포스는 BBC에 “당시엔 여성이 축구선수가 되는 건 불법이었고 내가 축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판이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심판 자격 획득은 외로운 투쟁의 시작이었다. 캄포스는 법률 자문을 통해 브라질 현행법에 ‘여성은 심판이 될 수 없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아벨란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후 몇 년간 캄포스는 수차례 친선 경기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최소 15번 체포됐다. 그의 열정에 불을 붙인 건 1971년 받은 멕시코 여자 월드컵 초청장이었다. 이 엄청난 기회를 붙잡으려면 아벨란제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했다.그가 우승한 ‘군의 여왕’ 대회가 열렸던 지역 부대에 메디시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은 또다른 기회였다. 해당 부대 사령관에게 부탁해 대통령과 독대할 ‘3분’을 받아냈다. 미인대회가 또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정을 들은 메디시는 캄포스를 대통령궁으로 초대했다. 캄포스는 “너무 무서웠다. 나는 독재정권에 도전하고 있었고 곧 체포되거나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풀렸다.
결국 아벨란제는 1971년 7월 기자회견에서 “캄포스는 이제 심판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고 선언했다. “브라질은 세계 최초의 여성 심판을 배출하게 됐고, 그 광경을 목격하게 돼 영광”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다. 하지만 몇 주 후 도착한 멕시코에선 고산병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귀국 후에도 여성 심판에 대한 편견은 여전했다. 그가 출전한 98개 경기 중 대부분은 낮은 수준의 리그였고, 언론에선 “선수들이 여자 심판에게 흥분할 것”이라는 등 성차별적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캄포스는 “선수들이 레드카드를 거부하거나 내 앞에서 욕설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말 존경받는 느낌을 받았다”며 “행복했다”고 회고했다.행복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74년 버스 사고로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사고를 낸 버스 회사는 공교롭게도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아벨란제 가문의 소유였다. 이 사고로 그는 미국에서 100번 넘는 수술을 받았고 2년 동안 휠체어를 탔다.
부부는 다행히 뉴저지의 한 임대 아파트에 정착했다. 브라질 심판들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해준 덕분이다. 캄포스는 “너무 감사하다”며 “제 투쟁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투쟁했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회는 크게 다르지 않다. 202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남자 챔피언스리그의 여성 주심이 배출됐다. 캄포스는 “스테파니를 보고 꼭 내가 성공한 느낌이었다”고 했지만, 여성 심판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고 꼬집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엄격한 훈련을 받아서 심판이 되는데 왜 남녀 경기를 구분하죠? 말도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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