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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업에 다른 자세. 아빠는 쪼그려앉기, 엄마는 농사용 엉덩이 방석.
▲ 마늘 심기 같은 작업에 다른 자세. 아빠는 쪼그려앉기, 엄마는 농사용 엉덩이 방석.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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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지켜보면 희한한 광경이다. 같은 작업인데 자세는 제각각이다. 밭에서 엄마와 아빠와 나는 어느 정도 맡은 역할이 있기도 하고 다 같이 달라붙어서 하는 일도 있다. 풀메기가 그렇고 엊그제 고추 따기도 그렇다. 아빠는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고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며 쪼그리기가 안 된다. 농사용 엉덩이 방석에 올라앉는 자세로 일해야 편하단다.

그럼 가장 최근 수술한 경력이 있는 나는 어떤가? 나의 모든 농사 자세는 사족보행이다. 무릎과 두 손, 네발 자세가 그나마 할 만하다. 실제 호랑이 걷기, 호보법이 운동효과는 좋다고 한다. 오래 하면 어깨가 아파오는 단점은 있다. 사실 농사일 자체를 안 하는 게 제일 좋은데 말이다.

우리 가족은 사이보그 인간이다. 생물과 기계 장치의 결합체. Cybernetic과 Organism의 합성어이다. 인공물의 도움을 받아 일상을 유지하는 인조인간. 엄마는 발목에 철이 박혀 있다. 아빠는 허리디스크 자리에 보형물이 들어가 있다. 나는 임플란트를 해서 구강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나사가 살벌하게 보인다.

우리 셋은 또 어쩌다 모두 디스크 탈출증 수술을 했는데, 몸이란 게 생물의 물성 때문인지 각자 고유하게 살아내는 일상이 다른지라 증상과 회복 결과가 자기 방식대로인 것 같다. 풀 뽑기 자세가 다 다른 이유인 게다.

환자와 노인 패밀리  
 
조금 더 작게 해서 두 번에 나르는 게 허리에 좋다고 해도 아빠는 말을 안 들으신다.
▲ 고추 수확 조금 더 작게 해서 두 번에 나르는 게 허리에 좋다고 해도 아빠는 말을 안 들으신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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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허리가 안 좋은데 일하는 자세가 다르다.
▲ 고추 따는 자세 똑같이 허리가 안 좋은데 일하는 자세가 다르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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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환자와 노인 패밀리이다. 누가 누굴 온전히 케어할 만큼 건강한 사람은 없다. 그중 가장 나이가 적은 내가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할 것 같지만 절대 아니올시다. 무거운 거 들기와 오래 앉아있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한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내 인생 좌우명이 된 마당에 나는 나대로 이기적으로 일을 요령껏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가훈은 "알아서 각자 아프지 말자"이다. 한 명이 병이라도 나면 농사 대체 인력이 없다. 아빠는 알아서 운전 조심하고 무거운 거 조심해서 들어야 하고, 엄마는 알아서 넘어지지 말 것이며, 나는 알아서 일을 잘 안 하고 있다.

안 다치고 병 안 나는 게 서로 폐 끼치지 않는 것이며 고마운 일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가 암묵적으로 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내가 읊어대기 때문에 아예 '가족교육헌장'이라 할 수 있겠다.

"아빠. 조금 더 작게 해서 두 번 날라요. 번거롭더라도 그게 허리한테 좋다니께."
"엄마도 힘들면 그때그때 쉬고요. 그리고 꼭 땅바닥 잘 보고 댕기고. 알었지?"


감자 수확을 앞둔 어느 날, 엄마는 기어코 넘어졌다. 팔목을 다쳤다. 넘어진 이유는 없다. 워낙에 평소에 잘 넘어진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이다.

"엄마. 괜찮아. 팔목 다친 게 다행이라니까. 엄마가 팔로 짚지 않았으면 골반 다쳤어. 엉치 금가면 진짜 큰일이지. 엄마 누워서만 살아야 돼. 지금이 나쁘지 않아. 괜찮아 엄마."

완벽하게 정직한 농사 
 
고추밭에 탄저병 약치고 있는 아빠.
 고추밭에 탄저병 약치고 있는 아빠.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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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근골격계의 타고난 우월성 덕에 유일한 청일점인 아빠가 여든 넘은 노인임에도 짐꾼의 역할을 한다. 엄마 없이 감자수확을 마치고 며칠 지난 아침이었다. 가족교육헌장이 무색하게 아빠는 결국 허리 통증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감자 10kg 박스 여나무 개를 혼자서 들고 날랐으니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또 못 일어난다. 네 아부지. 농사를 계속했다간. 네가 그냥 땅을 팔아. 네 아부지 농사일 못허게 말여."

먼저 땅을 팔자고 한 건 작은아버지였다. 이건 확실한 재발이고 수술은 당연 예상하며 그대로 누워 병원행이었다. 다행히 간단한 시술로 직립보행이 가능해져서 수술과 입원은 면하게 되었지만 아빠는 내심 여간 놀라신 게 아니었다.

여하튼 엄마는 기브스 한 팔로 풀도 뽑고 고추도 땄고 여름을 보냈다. 부상투혼 중에도 김장배추를 제때에 심고 마지막 고추까지 잘 땄다. 두 분 다 회복은 잘 되었다. 봄 마늘도 심었고 고구마 캘 차례이다.

작은아버지 도움도 있었고 해서 큰 차질이 없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기껏 작년 수확량의 절반 조금 더 나왔다. 감자가 그랬고 파프리카와 단호박은 정말이지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뭄이 길었고 장마도 길었던 탓에 고추는 탄저병까지 돌았다.

결정적 원인은 바로 가뭄도 장마도 아닌 우리가 덜 신경 쓴 게야, 라며 아빠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밭농사도 다르지 않았다. 병원 드나드니라 밭에 조금 덜 다녀간 것이 이렇게 큰 표시가 날 줄이야. 흙은, 땅은, 농사는 진짜 거짓말을 안 한다. 완벽하게 정직하다.

그래서 더 귀중하다, 말하면 무엇하랴, 오늘 저녁 상차림에서 나는 감자 한 알 단호박 한 토막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 인사라도 하며 먹을 정도다. 그리고 땅이 팔릴 때까지 우리 셋 다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사이보그, #허리디스크, #고추탄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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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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