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법원, 새 회기 시작...주목할만한 5가지 사건

  • 홀리 혼데리히, 안토니 저커
  • BBC News, 워싱턴
이번 달 3일부터 새로운 회기를 시작한 미 연방 대법관 9명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이번 달 3일부터 새로운 회기를 시작한 미 연방 대법관 9명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3일(현지시간)부터 새 회기를 시작한 가운데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들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현재 보수 6명 대 진보 3명으로 보수 쪽으로 기운 대법원은 지난 6월에 종료된 회기에서 총기권을 강화하고 당국의 기후 변화 관련 규제 권한을 제한했으며, 임신 중지권을 보장한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지난주 발표된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8%가 대법원의 행보에 불만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법원을 "상당히" 또는 "꽤" 신뢰한다는 비율은 2년 전에 비해 20%P나 하락한 47%로 집계됐다.

이번 달부터 시작한 새 회기에서도 소수인종 우대 정책, 선거, 성소수자(LGBTQ)의 권리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여러 획기적인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면서 타라 그로브 텍사스대 법대 교수는 "또다시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회기가 될 것. 모든 징후가 다사다난한 회기가 될 것임을 가리킨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물론 흑인 여성으로선 커탄지 브라운 잭슨이 미 역사상 최초로 대법관 자리에 오르며 역사를 새로 썼으나, 보수 진영이 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진보 성향의 잭슨 대법관이 대법원의 전반적인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이번 회기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본다.

1) 대입 소수인종 배려 정책

먼저 대법원은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 사건 등 대입 전형에서의 소수인종 배려 정책 존폐에 관해 심리할 예정이다.

두 사건 모두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A)'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제기했다. 이들 단체는 대입 전형 내 "선발 요소로 인종을 고려하지 않는 (colour-blind) 원칙"을 복원하고, 소수인종 배려 정책을 폐지해달라고 주장한다.

SFA는 하버드대의 현 소수인종 배려 정책이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불리하며,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 백인 및 아시아계 학생들 대신 흑인과 히스패닉 등에게 더 많은 입학 기회를 줬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하버드대를 포함한 명문 대학은 물론 미국 내 모든 대학의 소수인종 배려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에 따라 대학교 최소 십여 곳의 입학 정책이 바뀔 수도 있다.

지난 6월 '돕스 대 잭슨여성보건기구' 사건을 통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면서 미 대법원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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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지난 6월 '돕스 대 잭슨여성보건기구' 사건을 통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면서 미 대법원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졌다

대법원은 이미 한 차례 소수인종 배려 정책에 대해선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돕스 대 잭슨여성보건기구' 사건을 통해 임신 중지권을 헌법상 권리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파기하는 등 보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 대법원은 판례를 뒤집을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이에 대입 소수인종 배려 정책 또한 폐지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그로브 교수는 "이번 대법원이 판례 유지보다 번복이 더 잦다고 말하기엔 불확실하다"면서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판례에 한꺼번에 맞서는 방식이 눈에 띄긴 한다. 사회에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하버드 대학교 및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대 SFA' 사건의 심리는 이번 달 31일로 예정됐다

2) 선거구 획정

한편 주정부의 선거구 획정 권한을 부여한 선거법에 대해서도 대법원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이는 미국의 선거 진행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노스캐롤라이나주 공화당 의원들은 주 의회가 선거구 획정 등 해당 주의 선거 과정 결정에 관해선 거의 전권을 지닌다는, "독립적인 주 입법 이론"을 밝혀 달라며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법원이 이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린다면 주 의원들은 소속 정당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선거구를 개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특정 후보자 혹은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위를 '게리맨더링'이라 부른다.

또한 주 의회만이 선거 규칙을 수정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올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이론적으론 주 의회가 부정 투표라는 근거로 선거 결과를 뒤집을 권한도 지니게 된다.

*주 의회가 선거 규칙을 정할 권한을 지녔음을 밝혀달라는 '무어(노스캐롤라이나 하원의장) 대 하퍼' 사건의 심리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3) 차별금지법 및 언론의 자유

한편 기업이 종교나 기타 신념을 이유로 특정 고객에게 서비스 제공을 거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뤄질 예정이다.

콜로라도주에서 '303 Creative LLC'라는 이름의 그래픽 디자인 서비스 업체를 운영하는 로리 스미스는 지난 2016년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 부부에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서비스 제공을 강요하는 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사실 지난 2018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대법원에서 다뤄진 적 있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 커플의 웨딩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콜로라도주의 어느 제빵사가 피소된 사건이다.

당시 법원은 제빵사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하면서도 성소수자의 권리를 강조하며 미국 사회에서의 동성애 차별에 관한 정면 돌파를 피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함께 있는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 잭슨 대법관은 이번 회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법관으로 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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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함께 있는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 잭슨 대법관은 이번 회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법관으로 일하게 됐다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은 대법원이 최근 몇 년간 얼마나 급속도로 우경화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윌리엄 에스크리지 예일대 법대 교수는 "현재 대법원은 (단순한) 우경화가 아니라 정치 스펙트럼 측면에서 극단적 보수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303 Creative LLC 대 오브리 엘레니스(콜로라도주 시민 권리 부서장)' 사건의 일정은 아직 정해진 바 없다.

4) 공정한 사용 및 예술적 표현

이번 대법원에선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관련된 오랜 분쟁 또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6년 사진작가 린 골드스미스는 가수 '프린스'의 얼굴이 담긴 워홀의 작품은 자신이 그 이전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앤디 워홀 시각예술재단'을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 소를 제기했다.

골드스미스는 1981년 보라색 아이섀도와 립글로스를 바르고 흰 배경 앞에 포즈를 취한 '프린스'의 사진을 촬영했다. 해당 사진은 미국의 연예 정보 패션 잡지인 '베니티 페어'의 표지 사진으로 사용됐다. 3년 후 '베니티 페어'는 해당 사진을 바탕으로 실크스크린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

해당 사건에선 '어느 작품이 타인의 작품에 대한 모작이 아닌,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완전히 변형했다고 판단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달라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이다.

같은 상황을 두고 어떤 이는 타인의 예술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표현이라 보는 한편 청원자인 골드스미스를 포함한 일부는 법적으로 보호받는 상표의 도용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답을 내놓는지에 따라 미국 예술계엔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타인의 작품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 시각예술재단 대 골드스미스' 사건의 심리는 오는 12일로 예정됐다.

1987년 사망한 앤디 워홀의 작품은 예술의 공정한 사용에 관한 대법원 사건의 중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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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987년 사망한 앤디 워홀의 작품은 예술의 공정한 사용에 관한 대법원 사건의 중심에 서있다

5) 동물권 및 주(州)간 교역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주의 정책은 비단 캘리포니아주 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사육된 돼지의 고기는 주에서 판매될 수 없다며 동물권 증진 법안을 추진하고자 했다.

해당 법에 따라 다른 주에 있는 육류 가공업체 또한 캘리포니아주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선 시설 개선 의무를 준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육장의 크기가 최소 24ft²(약 2.22㎡)가 되지 않는 농장에서 생산된 육류의 유통을 금지하는데, 현재 미국에선 해당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돼지 사육장이 대다수이다.

해당 법에 대해 다른 주와 돼지고기 업계는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이러한 요구 조건이 주(州)간 교역에 대한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기후변화 대응법 및 낙태 시술을 위한 다른 주로의 이동 관련법 등 한 주의 결정이 다른 주에도 영향을 미치는 다른 여러 법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 '전국 돼지고기 생산자 위원회' 대 카렌 로스(캘리포니아주 식량농업부서장)' 사건의 심리는 오는 11월로 예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