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진은 지난 3월 8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지난 3월 8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한 달 만에 지인들과 모였다. 아저씨 5명으로 구성된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태어나 지금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 '보수의 텃밭'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진보'를 지향하고 지지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지역 특유의 정서상 내 정치적 소신을 떳떳하게 밝히기 어렵다 보니 이들과 가끔 만나 허심탄회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어쩐지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다들 침묵 모드였다. 대선 전까지만 해도 서로 말 한 마디 더 하려고 나서던 사람들인데... 정적이 어색한 나머지 내가 말문을 텄다.

"오늘 오는 길에 보니 사거리 건물마다 시장 후보다, 지방의원 후보다 하면서 온 천지에 시뻘건 현수막이 걸려 있습디다. 그런데 신문 기사 보면 민주당은 아예 후보 이름도 찾기 힘드네요."

"... 고마해라. 정치 이야기 고마하자. 그냥 술이나 묵자."

가장 큰 형님이 조용히 술잔을 들며 말했다. 우린 모두 술잔으로 입을 막았다. 결국 실없는 농담과 사는 이야기들로 그날의 모임은 끝이 났다.
 
윤석열 대통령 시대, 그후

     
경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의 현수막에 눈에 띈다.
 경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의 현수막에 눈에 띈다.
ⓒ 조명호

관련사진보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고백하건대 윤 당선인의 대구 득표율 75.26%엔 내 표가 없다. 대선 다음날,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 앱을 삭제했다. 선거 기간에는 수시로 들락거리며 누군가 공유한 정치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달면서 즐겨 이용했지만, 이젠 그럴 재미가 사라졌다. 인터넷 포털 뉴스 기사도 한동안 보지 않고 있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TV에서 뉴스가 나오면 그냥 돌아서 나온다.

세상 돌아가는 뉴스로부터 눈과 귀를 최대한 차단하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술을 마신 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기사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손님! 요즘 기분 좋지예? 윤석열이 잘하는 거 같지요? 이번 지방선거도 국민의힘이 확 쓸어뿌야 될낀데... 앞으로 기대가 정말 큽니다."

아뇨, 기사님. 저는 기분이 안 좋습니다. 제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큽니다.

차마 이렇게 답하진 못하고 그저 허허 웃었다. 지금 대구는 모두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뭐 어쩌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대구다. 나의 정치적 지지와 지역의 정치 지형이 일치하지 않았던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 않나. 적응하자, 무뎌지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보름 뒤 박근혜가 대구에 돌아왔다. 지난 해 연말 특별 사면된 그는 대구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 집을 구했다.

박근혜가 오기 전부터 지지자들은 그가 입주할 집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각종 환영 현수막과 꽃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언론들은 연일 박근혜 자택 주변 분위기와 시민 반응을 전했다. 한 지역 일간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동영상을 제작했다. 대구 시내에서 달성군 자택까지 가는 길을 생중계하듯 찍어 시민들에게 친절히 알려줬다.

3월 24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카메라 앞에 선 박근혜는 "지난 5년은 저에게 무척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언급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당한 그는 국민을 향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대구에선 그래도 된다고 안심한 걸까. 그래서 대국민 메시지랍시고 내놓은 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속내를 털어놨을까.

"저의 사면이 결정된 후 '이곳 달성에 오면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돌봐드리겠다'는 언론기사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제가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대구가 이상한가, 내가 이상한가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파면된 박근혜씨가 8일 본인이 후원회장을 맡은 유영하 대구시장 예비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파면된 박근혜씨가 8일 본인이 후원회장을 맡은 유영하 대구시장 예비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 유영하tv

관련사진보기

 
이런 와중에 수감 생활 중인 박근혜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유영하 변호사가 대구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박근혜는 그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유영하는 대구와 인연이 없다. 17, 18, 19대 총선에서 경기도 군포에 출마했지만 연달아 낙선한 인물이다. 어릴 때 잠깐 대구에 살긴 했지만 그것 말곤 딱히 연결고리가 없다. 굳이 인연을 찾자면 최근 달성군에 있는 박근혜의 집을 계약하고 비용을 입금하는 등의 부동산 법률행위를 도운 것뿐이다.

대구 시민들도 다 안다. 그래도 그는 대구시장에 출마한다. 박근혜의 후광이 이 지역에서 여전히 통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8일 "제가 못 다한 꿈들을 유 후보가 저를 대신해 이뤄줄 것"이라며 공개 지지선언을 하기도 했다. 

홍준표 국회의원도 나왔다. 이번에는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대구시장 후보다. 서울에서 4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내고 경남지사까지 역임했던 그는 지난 총선에서 경남 양산을 떠나 갑자기 대구 수성구로 와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이번 대선 국힘 경선에서 패한 뒤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국민의힘 중앙당에서는 경선 때 '현역 의원' 페널티를 적용한다고 하나 홍준표는 여론조사에서 상당한 격차로 1등을 달리고 있다.

여론조사 2위 후보도 국민의힘이다. 바로 김재원 전 최고위원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국회의원 3선을 했다. 홍준표나 김재원이나 둘 다 학창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지만 정치 생활은 다른 곳에서 했다. 대구 시민들도 안다. 그래도 대구시장에 출마한다. 대구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국민의힘 공천만 받으면 다 이해해줄 거라고, 뽑아줄 거라고 믿는 걸까.

출퇴근길 곳곳에 시의원, 구청장, 시장 등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거리가 온통 빨간색 천지다. 대구시장 선거만 해도 국민의힘 후보는 홍준표, 김재원, 유영하, 이진숙, 정상환, 김형기, 권용범, 김점수 등 8명이다. 반면 민주당 후보는 김동식, 서재헌 2명이다(김동식 대구시의원은 10일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 편집자 말). 다른 정당의 경우에도 정의당 1명(한민정), 국민의당 1명(정용)뿐이다.

대구 바로 밑 경산시장 선거 상황은 더하다. 국민의힘 후보는 오세혁, 조현일, 안국중, 송경창, 이천수, 허개열, 황상조, 정재학, 김성준, 유윤선, 이성희, 김일부, 류인학 등 13명이다. 민주당 후보는 아예 여론조사에서 보이지 않고 정의당도 아직까지 예비후보 등록자가 없다.

누군가는 대구도 변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김부겸이 2016년 대구 수성구에서 당선되기도 했지만 그건 김부겸 개인의 역량 때문이지 대구 지역 정치의 바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홍의락이 국회의원이 됐지만 민주당이 아니라 무소속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구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반복되는 자극 따위에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면역'이라고 한다. 이 지경까지 왔으면 대구 정치 지형에 무감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 내 마음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마음으로는 6월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투표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가 되면 또 꾸역꾸역 투표장으로 나갈 것이다. 장담컨대 이번에도 나는 당선되지 않을 후보에 표를 던질 것이다.

대구는 왜 이럴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결론을 내보려 했지만 정말 모르겠다.

태그:#대구, #국민의힘, #박근혜, #보수, #더불어민주당
댓글29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