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아동 성범죄를 “장난”…처벌강화법 ‘골든아워’ 놓친 국회

심윤지 기자

2012년 통영 초등생 성폭행 살해, 제주 올레길 여성 성폭행,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연초부터 연달아 일어난 강력범죄에 19대 국회에서 아동·여성성폭력대책특위가 열렸다
아동 성폭행 처벌 하한선 상향에 남성 의원들 “과잉처벌 우려” 이유로 반대…결국 무산
감경 사유 제한 개정안도 법사위서 폐기…7년 전 제대로 논의됐다면 n번방 나왔을까

“n번방 사건을 보며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19대 국회의 아동·여성대상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성폭력특위) 논의 과정을 지켜본 한 전직 여성 국회 보좌관이 6일 말했다.

2012년은 통영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사건, 제주 올레길 여성 성폭행 사건,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등 강력 성범죄가 잇달아 일어나 성범죄에 대한 강력 처벌 여론이 비등했던 해다. 그해 9월 국회 성폭력특위는 이례적으로 입법 권한을 부여받아 아동·청소년성보호법과 성폭력특례법을 전부 개정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한두 조항만 바꾸기 어렵다면 그와 연관된 다른 법률까지 전부 바꿔서라도, 성범죄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자는 취지였다.

7년 뒤 사회를 뒤흔든 n번방 사건이 일어난 것은 결과적으로 이때 제대로 된 입법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때 논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경향신문은 19대 국회 성폭력특위 소회의록을 통해 아동 성범죄자 처벌 강화 논의를 들여다봤다. 소라넷부터 웹하드카르텔, 웰컴투비디오와 텔레그램 n번방 사건까지 비슷한 사건이 계속 반복되는 데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안이한 인식으로 ‘골든아워’를 흘려보낸 국회의 책임이 컸다.

19대 총선이 있었던 2012년은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등 강력 성범죄가 잇달아 터지며 처벌 강화 여론이 높았던 해다. 국회는 개원 직후 많은 권한을 위임한 특별위원회를 꾸려 관련법 정비에 나섰지만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사진은 2012년 7월 19대 국회 개원식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19대 총선이 있었던 2012년은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등 강력 성범죄가 잇달아 터지며 처벌 강화 여론이 높았던 해다. 국회는 개원 직후 많은 권한을 위임한 특별위원회를 꾸려 관련법 정비에 나섰지만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사진은 2012년 7월 19대 국회 개원식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올리지 못한 처벌 하한선

성폭력특위는 거의 모든 성폭력 범죄를 다뤘다. 이때 정해진 법정형 대부분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모든 성범죄에서 친고죄가 폐지되고 아동 성범죄 법정형이 전반적으로 상향하는 등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의원 발의안보다 형량이 후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른 법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당시 법무부·법원 관계자들이 성폭행 처벌 강화에 반대하며 든 주요 근거다. 남성 국회의원들도 동조했다. ‘성범죄가 중해도 살인보다 중범죄는 아니다’ ‘젊은이들이 장난으로 한 행위에까지 실형이 선고될 수 있다’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처벌 가능하다’…. 여성의 목소리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무리한 주장’으로 치부돼 허공으로 흩어졌다.

2012년 10월17일 특위 소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쟁점 중 하나는 아동 성폭행의 ‘처벌 하한선’을 징역 5년 이상에서 7년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었다. 하한선 올리기가 중요했던 건, 판사들이 아동 성범죄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저 형량을 7년으로 올리면 판사가 작량감경(임의감경)을 해도 최소 3년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 한다. 집행유예는 3년 이하의 징역형부터 선고가 가능하다.

7년으로 상향하는 법안을 발의한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소위원장)은 “아동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와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불안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인순 민주통합당 의원은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 성폭력특례법상 최저 형량이 이미 징역 10년이라는 점을 짚었다. 14~19세 대상 성범죄도 현행 5년보다 높여 균형을 맞추고, 우리 사회가 이를 살인에 준하는 중대한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도 했다.

법무부는 반대했다. “강간이나 강제추행죄가 아주 무거운 범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보다도 더 무겁다고 할 수는 없다”(길태기 법무차관)는 것이다. 법원이 양형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굳이 법 개정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들었다. 살인죄의 최저 형량은 징역 5년이다. 남성 의원들은 공범의 ‘과잉처벌’ 우려를 이유로 하한선 상향에 반대했다. ‘망을 본’ 고교생까지 실형을 살라는 것은 가혹하다는 취지다.

“옆에서 위협만 한 애들은, 5년으로 해놓으면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는데 그냥 3년6개월 가둬놓는 거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인데… 약간의 위력을 가한 아이 부모 입장에서 봤을 때는 대한민국 법에 이런 X법이 어디 있냐 말이에요.”(권성동 새누리당 의원·1차 회의)

“대학생들이나 이런 친구들이 망만 봤는데 3년6개월을 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제가 제일 고심하는 거예요.”(최원식 민주통합당 의원·4차 회의)

결국 특위는 하한선을 5년으로 유지하되 상한선에 무기징역을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 냈다. 하지만 이미 법정 하한선에도 못 미치는 선고가 내려지는 상황에서, 상한을 무기징역으로 올린다 해도 법 개정 효과가 클 수는 없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법안이 올라와 비슷한 논리로 폐기되는 일이 반복됐다.

■ 아동 음란물 형량도 후퇴

아동 강간죄의 최저 형량이 ‘5년 이상 유기징역’으로 정해지자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의 형량도 줄줄이 내려갔다. 텔레그램 성착취 n번방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죄목이다.

특위는 음란물 제작 형량을 ‘5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무기 또는 10년 이상 유기징역’ 등으로 올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역시 처벌 하한선을 끌어올리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특위는 이번에도 5년 이상 징역을 그대로 유지했다. ‘무기징역도 가능하다’는 문구만 추가했다. 청소년들이 장난으로 찍는 행위는 ‘범죄’가 아니므로, ‘과잉처벌’ 우려가 있다는 법무부 논리를 넘지 못했다.

“제작이라 하더라도 아주 대규모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린 애들이 장난으로 하다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10년 이상 이렇게 하게 되면 아까 성범죄에 말씀드린 쪽과 똑같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냥 현행 유지 쪽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길태기 차관·4차 회의)

“갑자기 얘기할 기운이 없네요. 하는 것마다 안되니까.”(남인순 의원)

“애들이 모르고 1회 제작한 것까지 잡아넣자고 저희가 법 만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이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리는 역할을 우리가 더 많이 해야 하는 거죠.”(김희정 의원)

형량 상향 논의와 함께 법률로 감경 사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도 나왔다. 특위는 아동 성범죄에 한해서는 초범, 합의, 반성, 공탁 등 4가지 사유로는 작량감경을 하지 못하도록 개정안을 논의했다. 2차 가해 우려가 있는 ‘피해자의 합의’, 피해자 동의 없는 ‘공탁’은 감경 사유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를 심사하는 법제사법위로 개정안을 올려보냈다. 하지만 법사위는 사실상 만장일치로 이 개정안을 폐기했다. 형법에 규정된 작량감경을 성범죄에만 적용하지 않는다면 ‘위헌 소지’가 있을 수 있고 감경 사유를 법률로 일괄 제한하는 것은 판사의 재판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법무부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임성근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국민적 비판에 “양형 기준은 계속해서 상향하고 있고 낮은 형을 선고했을 땐 언론에서 비판할 것이다. 조금만 지켜봐주시는 것도 좋겠다”(4차 회의)고 했다.

개정안이 만들어지고 수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세계 최대 규모 아동 성착취 영상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는 1심에서 집행유예, 2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실은 지난해 10월 미국 수사기관의 브리핑을 통해서야 뒤늦게 알려졌다. 영리 목적의 음란물 배포의 법정형은 10년 이하 징역이다. 법원은 ‘나이가 어리며 부양가족이 있다’는 점을 참작했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성착취로 규정하고 제작과 배포, 소지 행위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연달아 발의됐지만 소관 상임위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6일 오후 현재 국회 국민동의청원 웹사이트에서 최다 동의를 얻은 1~3위가 모두 디지털 성범죄 관련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6일 오후 현재 국회 국민동의청원 웹사이트에서 최다 동의를 얻은 1~3위가 모두 디지털 성범죄 관련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 가해자 시각 내면화한 국회

“아동·청소년 성범죄는 무거운 범죄지만 전체 형사사법체계를 고려해 처벌 강화는 신중해야 한다.”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들의 말은 언뜻 중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살인이나 강도 같은 범죄보다 덜 무거운 것으로 보는 인식이 숨어 있다. ‘젊을 때 호기심에’ ‘순간적 충동으로’ ‘주범에 휩쓸려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해자의 시각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니면 소녀를 납치해서 짐승처럼 하는 경우가 아니고 (청소년들이) 셀카 찍는 것도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의 개념에 포섭이 되는데…”(권상대 법무부 형사법제과 검사·4차 회의)

“아주 정말로 참작할 일이 생겼을 때는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줘야 하거든요. 밤에 절도하러 들어갔다가 사람을 보고 음심이 생겨서 강간을 하다가 나올 때 물건 하나 집어 나오면 특수강도강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법정형이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입니다.”(길태기 차관·4차 회의)

n번방 사건은 10~20대가 ‘장난처럼’ 불법촬영물을 제작·유포·배포하는 행위가 피해자의 인격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국회가 ‘가담 정도가 경미한 사람까지 실형을 받아선 안된다’며 가해자를 보호하는 동안, 가해자들은 ‘조금만 조심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쌓아갔다.

이제 여론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n번방 사건이 알려지고 가입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 아동 성착취를 근절하려면, 공급자뿐 아니라 수요자도 가해자로 호명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성범죄를 ‘젊은 시절의 장난’쯤으로 치부하는 논리는 여전히 국회의 지배적 문법이다. 지난달 디지털 성착취 방지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논의하는 법사위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석자들은 ‘개인 소장’ 목적의 딥페이크(사람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한 것) 제작을 처벌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면서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 “자기만족을 위해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로) 갈 것이냐”(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지금까지 성범죄 관련법을 대하는 국회의 패턴은 여성 의원들 중심으로 성폭력법 개정을 요구하면 ‘법체계에 어긋나는 무리한 요구’라며 반대하다가, 사건이 터지면 부랴부랴 발의안을 내고 여성 의원들을 찾는 일이 반복돼온 것으로 크게 요약된다. 2012년 성폭력특위 때 ‘골든아워’를 놓쳤다고 말한 전직 국회 보좌관은 “다른 법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말에는 성범죄를 중요하지 않은 범죄로 보는 가치가 개입돼 있다. 살인 같은 강력범죄 못지않게 피해자 인격을 파괴하는 중범죄라는 인식으로 전환되면 충분히 강하게 처벌할 수 있다. 의지의 문제”라고 했다.

[관련영상]사법부의 판결과 관련해서는 ▶ [읽씹뉴스]초범이라, 반성해서···아동성착취물 제작해도 집행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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